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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로에서] 이낙연 심중(心中)에 호남은 있는가 - 장필수 논설실장
2024년 02월 21일(수) 00:00
정치인 이낙연 만큼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도 드물다. 5선 국회의원에 전남지사를 지냈고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문재인 정부 최장수 국무총리까지. 대통령을 빼놓고 할 것은 다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경선에도 나갔으니 어찌보면 대통령이란 목표도 목전에 뒀다고 할만하다.

여한이 없을 법도 한데 이런 정치인이 22대 총선을 앞두고 24년 몸 담아온 민주당을 탈당하고 제3지대 통합 신당에 합류했다가 11일만에 통합을 철회했다. 이낙연은 지난 달 민주당 탈당의 변으로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김대중(DJ)과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와 품격은 사라지고, 폭력적이고 저급한 언동이 횡행하는 ‘1인 정당’ ‘방탄 정당’으로 변질했다고 비판했다.

한 달만인 20일 개혁신당을 나오면서는 “낙인과 혐오와 배제의 정치가 답습됐고 그런 정치를 극복하려던 우리의 꿈이 짓밟혔다”면서 “초심으로 돌아가 민주당을 대신하는 ‘진짜 민주당’을 세우겠다”고 했다. 한 달 사이 두 개의 정당을 깨고 나오면서 DJ 정신을 운운하며 텃밭 호남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민주당 대안 세력을 주장하고 있다. DJ의 공천으로 정계에 입문해 ‘꽃길’만 걸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닌 듯 하다.

호남 민심 경청해 판단해야

이낙연은 진보 진영 정치인들이 겪은 민주화운동 등 험난한 정치 역정을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정계에서는 같은 중량급 정치인인데도 평생 ‘희생의 정치’를 실천해 온 김부겸과 비교하곤 한다. 둘은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뒤 서울대를 다닌 공통점이 있다. 한 명은 학생운동을 치열하게 해 수감생활을 했고 한 명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기자가 됐다. 김부겸은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광장을 가득 메운 1만2000여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감동적인 연설로 단번에 현장 분위기를 독재 타도쪽으로 돌린 천재적인 대중 연설가로 학생운동사에 기록돼 있다. 김근태 등 4, 5공화국 시절 민주화운동 세대의 막내이자 전대협을 중심으로 한 386세대의 큰형으로 매개 역할을 하면서도 운동권 출신 답지 않은 유연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신망이 두텁다.

정계에 진출해선 이낙연이 고향에서 16대부터 19대 총선까지 내리 4선을 하는 동안 김부겸은 국회의원에 두 번 낙선한 뒤 16대부터 18대까지 경기 군포에서 3선을 했다. 하지만 19대에선 쉬운 길을 버리고 험지인 자신의 고향 대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과 2014년 민선6기 대구시장 선거에 잇따라 출마해 낙선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2020년 21대 총선에서 대구 정치 1번지인 수성갑에 민주당 깃발을 꽂았다. 김부겸이 험지에서 고난의 행군을 하는 동안 이낙연은 전남지사를 거쳐 21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 당선돼 김부겸과 여의도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5선의 이낙연과 4선의 김부겸은 문재인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인연도 있다. 그러나 이후 행보가 더욱 선명하게 갈린다. 김부겸은 민주당이 정권을 내주자 미련없이 정계에서 은퇴했지만 이낙연은 탈당에 이어 ‘정권 심판’이라는 고향 사람들의 염원을 뒤로 한채 야당 분열의 길을 걷고 있다. 호남 유권자들은 DJ와 노무현의 진보진영 10년 정권 창출을 주도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민주당의 험지인 부산에서 수차례 도전끝에 뜻을 이룬 ‘바보 노무현’을 민주당 대선 후보로 만들어 결국 정권 창출을 해낸 기억을 잊지 못한다. 이런 호남 유권자들이 이낙연의 정치 행보에 배신감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원인을 대장동 사건을 퍼뜨린 이낙연에게서 찾는 지역 정서가 여전한 것도 ‘배신자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힘든 구조다.

연속 탈당으로 사면초가에 놓여

호남 유권자들은 민주당을 ‘우리당’으로 부를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이재명의 당이어서도 아니고 오랫동안 진보정당의 정통성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호남을 기반으로 중진 정치인이 된 이낙연이 민주당을 버리고 신당을 만들어 총선에 뛰어든 것에 분노하는 이유다. 지역민들은 2000~3000표 차이로 승부가 갈릴 가능성이 높은 수도권에 이낙연 당이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정치인 이낙연은 평생 ‘희생정신’을 보여준 적이 없다는 평가가 많다. 호남을 위한 정치를 하기 보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정치 역정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보이고 있는 갈짓자 행보도 그런 맥락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정치 9단’ 김종인은 이낙연을 향해 “정치인은 마무리를 어떻게 잘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이낙연은 결국 자신이 창당한 ‘새로운미래’로 총선을 치르게 됐다. 제3지대 빅텐트를 걷어 차고 나온만큼 호남을 기반으로 의미있는 득표를 하지 않으면 정치인으로서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그런데 새로운미래는 민주당에서 현역 의원평가 하위 20% 통보를 받은 의원들과 접촉하겠다고 밝히는 등 이른바 ‘이삭줍기’에 주력할 뜻을 밝혔다. 현실이겠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정치인 이낙연에게 미래가 있으려면 지금이라도 호남 민심에 귀 기울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