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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결함과 완성 - 황성호 신부·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4년 02월 01일(목) 21:30
잘난체하고 목이 뻣뻣한 이들에게서 우리는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사악하며 폭력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함께 살기보다 타인을 짓밟고 착취하기 때문이다. 많이 배웠다거나 재화를 많이 소유했거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타인을 무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만일에 많이 배웠고, 소유하고 독점하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요 완성이라고 한다면,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치열한 경쟁과 타락의 현장일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이 갖추어져야 완벽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예수는 사랑의 계명을 하느님 아버지의 모범과 연결하여 마태오 복음 5장 48절의 말씀인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신다. ‘완전한’이라는 단어의 ‘텔레이오스’라는 말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완성되어가고 이루어진다는 과정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모델로 삼아 우리도 이 지상에서 사랑을 완성해 가라는 의미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내어주셨는데, 하느님은 말씀과 실행으로 완전함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런 완성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자신의 사랑과 희생으로 보여주셨다. 그래서 복음서는 완전한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다.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인 우리는 타인과의 삶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기도 한다. 타인이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울이 되는 것처럼, 사회 안에 살아가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그 부족함을 채워나가기도 한다. 때론 자신도 모르게 자기 삶의 모습이 타인의 부족함을 채워주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상식적 통합을 이루는 기본적인 자아실현이라고 본다. 그러나 경쟁에서의 승리,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힘의 추구는 상식적 통합은 물론 자아실현을 망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동물이라 일컫는 우리는 완전할 수 없는 것일까?

‘하마르티아’라는 그리스어는 ‘빗나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경에서 ‘하마르티아’는 원죄를 말하는데, 더러움을 의미하며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룩한 것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자기 자신에게 어떤 결함이나 부족함이 있다면 누구도 모르게 결함을 감추거나 부족함을 채우려고 한다. 그런데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의 뒤에 숨어 자신의 결함을 결함이 없는 완전한 것처럼 철저히 감추고, 부족함을 허영과 부자연스러움으로 덧칠하게 되면 더 추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트라우마에 갇힌 것인지 아니면 짧은 경험과 지식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결함과 부족함을 보완하기보다 어리석음이 표출되기도 한다.

혹자는 나름의 결함이 사람의 인격을 만들어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함은 인격을 만들고 그 사람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여 사람의 인격이라는 문이 열리는 문고리와도 같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인지 모르지만, 결함이 없는 척하면서 미사여구를 많이 사용하고 외향적 화려함으로 부자연스럽게 덧칠하면 더욱더 비인간적으로 보일 것이다. 결국 그 존재는 하나의 기계와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지 않을까?

인간 존재인 자신이 완전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자신의 존재 실현을 위해서 결함을 보완하고 부족함을 채워나가는 상식적인 통합을 이루는 자아실현이 완성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어 희생하셨던 최고의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할 것이다. 사랑을 직접 몸으로 사셨던 예수께서 마태오 복음 22장 39절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 완전함은 거룩함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런데 거룩함은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