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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예향] 나눔은 문화와 세상을 바꾼다 - 하정웅 컬렉션
사업가가 뿌린 기부 씨앗 독보적 ‘하정웅 컬렉션’으로 성장
영암 출신 재일교포 사업가 하정웅, 미술품 2536점 광주시에 기증
시립미술관 소장품 60% 차지…국립현대미술관 이어 두번째로 많아
파블로 피카소 ‘여인상’, 앤디 워홀 ‘모택동’, 이우환 ‘선으로부터’ 등
매년 ‘하정웅 청년작가상’ 공모…유망 청년 미술인들 발굴·지원
2023년 05월 08일(월) 18:35
지난 1993년 광주시에 평생 모은 미술품을 기증한 재일교포 사업가 하정웅 선생의 메세나를 기리기 위해 개관한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 미술관.
오랜 만에 다시 찾은 서울시립미술관의 천경자갤러리는 명불허전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숨겨진 보고(寶庫)답게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하지만 천경자 갤러리에서 느낀 감동의 지점은 매번 달랐다. 어떤 날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년 작)에 필이 꽂혔는가(?) 하면 다른 날은 그녀의 화구(畵具) 앞에서 발길이 떠나지 않았었다.

서울 덕수궁 인근에 자리한 서울시립미술관에 천경자갤러리가 둥지를 틀 게 된 건 작가의 기증 덕분이다. 고흥출신인 천경자(1924∼2015) 화백은 서울시가 자신의 ‘분신’들을 잘 챙겨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지난 1998년 작품 93점을 흔쾌히 내놓았다. 그녀의 믿음대로 서울시립미술관은 지난 2002년 국내 미술관으로는 처음으로 작가의 이름을 딴 70평 규모의 갤러리와 전담 학예사를 배치하는 등 ‘VIP 예우’로 보답했다. 또한 매년 상설기획전과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그녀의 예술세계를 널리 알리는 문화명소로 가꾸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천경자 컬렉션이 있다면 광주시립미술관에는 ‘하정웅 컬렉션’이 있다. 광주시립미술관에 ‘셋방살이’를 했던 하정웅 컬렉션은 지난 2017년 3월 옛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으로 이전해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 미술관’이라는 새로운 간판으로 독립했다.

하정웅 컬렉션은 영암출신 재일교포 사업가 하정웅(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씨가 지난 93년 212점을 시작으로 20여 년에 걸쳐 광주시에 무상으로 기증한 2536점의 미술품이다. 이는 광주시립미술관의 총 소장품 4643점 가운데 60%로, 하씨 기증 덕분에 광주시립미술관은 국내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소장품을 보유하게 됐다.

하정웅 컬렉션을 살펴 보면 드로잉·판화가 1081점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이 회화 795점, 사진 263점, 조각 29점, 한국화 27점, 뉴미디어 11점, 서예 11점, 공예 4점 등의 순이다.

앤디워홀 작 ‘모택동’
이들 가운데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여인상’, 살바도르 달리의 ‘초봄의 나날들’, 앤디 워홀의 ‘모택동’ 등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도 들어있다. 특히 재일교포 현대미술작가 이우환(76)의 ‘선으로부터’ 등 70∼90년대 작품 14점을 비롯 손아유, 곽덕준 등 재일교포작가와 벤샨 등 외국작가들의 인권을 주제로 한 작품은 하정웅 컬렉션의 하이라이트다.

일본 모노파의 창시자인 이 화백은 최근 소더비 등 국제경매시장에서 수십억원에 거래되는 최고의 블루칩작가.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1년 작품구입예산이 10억(2012년 기준)에 불과한 광주시립미술관으로서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특히 광주시립미술관 소장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하정웅 컬렉션은 ‘마이너리티를 위한 기도와 인류의 평화’라는 뚜렷한 지향점을 갖고 있다. 이는곧 ‘민주·인권·평화’의 도시인 광주의 정체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광주시립미술관 소장품의 색깔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역사와 시대적 숙명으로 희생당한 자들을 위한 ‘기도의 미술’이라 불리는 하정웅컬렉션과 질곡의 한국현대사를 상징하는 광주와의 인연은 어찌 보면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에 꾸며진 하정웅 아카이브와 전시 모습.
미술관의 컬렉션은 도시의 품격이자 미술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지표다. 그런 점에서 인권계열의 작품들이 다수 포함된 하정웅 컬렉션은 민주·평화·인권을 지향하는 광주의 이미지에 부합한 문화상품이다.

하정웅 미술관(컬렉션)은 청년 미술인들의 꿈을 키워주는 산실이기도 하다. 다름 아닌 하정웅 청년작가상이다. 근래 국내외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광주지역의 40~50대 청년 작가 가운데 가운데 상당수가 하정웅 청년작가상 수상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광주시립미술관은 지난 2001년부터 매년 각 권역별로 45세 미만의 유망청년작가(광주·전남, 대전·충청, 부산·경남, 서울·경기 등)를 대상으로 하는 하정웅청년작가상을 공모하고 있다.

하정웅작가상은 국내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한다. 비슷한 시기에 제정된 국립현대미술관이나 부산시립미술관의 청년작가상이 현재 중단되거나 규모가 축소된 것과 달리 한해도 거르지 않고 청년작가들의 든든한 서포터즈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하정웅 작가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데에는 하씨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1999년 2차 기증 당시 하씨는 (감사의 표시로) 보상의 뜻을 전해온 광주시에 “어려운 여건에 처한 국내 청년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공모전을 개최해달라”고 제안했다. 그의 뜻을 기려 시립미술관은 국적이나 지역에 제한을 두지 않고 매년 엄격한 심사를 거쳐 독창성과 발전가능성이 높은 작가 5~6명을 선정한다. 2018년까지 배출된 역대 수상자 119명 가운데 타 지역 출신이 89명인 것도 그 때문이다.

하씨는 지난 3월 28일 열린 ‘제23회 하정웅청년작가 초대전-빛2023’(7월16일까지)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령에도 불구하고 광주를 찾았다. 몇년 전 신장수술을 받은 그는 코로나19로 몸이 쇠약해졌지만 올해 선정된 강원제, 김덕희, 유지원, 안준영 등 4명의 작가들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전시담당큐페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작가들의 작품에 깊은 관심을 보인 하씨는 오히려 젊은 작가들의 에너지를 느낀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평생 모은 소중한 작품들을 광주에 내놓게 된 사연을 들려줬다.

“처음 작품을 광주에 기증할 때 주변에 찬성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왜 광주같은 지방으로 보내느냐, 서울에 있는 미술관에 기증하면 훨씬 대우 받을 것이라고 했죠. 저는 지방도시가 발전해야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어요, 문화는 전국이 고루고루 발전해야합니다. 광주에 기증한 후 영암 등 지방 도시에 꾸준히 기증한 이유입니다.”

하 관장은 자신의 기증에 대해 “자그마한 촛불 하나 밝힌 것, 씨를 뿌린 일”이라며 “촛불을 꺼트리지 않고 계속 타오를 수 있게 하고, 뿌린 씨를 키워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진현 문화선임 기자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