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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의 산행-중 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2년 04월 02일(토) 00:15
증심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산책을 나설 때 나름의 계획은 봉황대-토끼등-바람재-장군봉-지산유원지였다. 증심교 옆 안내도에서 이 코스를 본 기억이 있어 이참에 한번 가보기로 한 것이다. 바람재까지는 여러 차례 다닌 구간이라 아무 문제 없이 갔다. 바람재에서 지산유원지 방면으로 가려면 숲속으로 난 작은 오솔길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바람재 쉼터의 표지판엔 지산유원지 방향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뒤에 확인해 보니 내가 찾지 못했을 뿐 표시는 되어 있었다.) 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큰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바람재에서 원효분소까지 2㎞’라는 표지판을 보고서도,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늦재 방면으로 계속 걸어갔다. 이 방향이 아닌 걸 뻔히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도대체 무슨 관성이 작용했던 것일까?

갈수록 주변 풍경은 산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다 보니 연등이 걸려 있는 문이 나오고 문 뒤로 살짝 한옥 지붕이 보였다. 분위기로 보아 절이 분명했다. 들어가 보니 원효사였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간 문은 원효사의 후문이었던 것이다. 얼떨결에 원효사까지 와 버린 것이다.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이르기를 “어리석은 자는 동쪽으로 가고자 하면서도 서쪽으로 간다”고 하였다. 이걸 보면서 ‘세상에 누가 이런 멍청한 짓을 할까?’ 생각했는데 내가 바로 그 한심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쩌다가 나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을까? 우선, 나는 이상한 조짐에 살짝 불안하면서도, 가던 길을 멈추고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보려 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꼭 지산유원지로 가야만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면, 아마도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을 것이다. 늦기라도 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서 평소에 핸드폰으로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면, 이상한 조짐을 느끼자 마자 곧바로 핸드폰을 꺼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내가 가고자 한 길에는 가는 길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안내자가 없었고, 나는 평소에 자신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았고,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 반드시 가야할 절실한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뭐, 가던 길로 가면 되겠지’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계속 걸었고, 급기야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만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현재 모습에 조금의 의문도 품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당연한 것, 으레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일이 잘못 흘러가고 있는 조짐이 여기저기서 보여도 그냥 지나쳐 버린다. 나중에 돌이키기 힘든 지경이 되어서야 크게 후회한다.

인생의 여정에서 올바른 길을 가려면 올바른 길을 안내할 스승이 있어야 하고, 스승이 제시한 길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그곳으로 가야만 할 절실함이 있어야 하고, 지금 내가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당신은 증심사에서 원효사로 가는 길을 새롭게 알게 되지 않았는가? 이것은 예상하지 못한 수확이다. 게다가 오랜 도반인 관음암 주지를 만나 같이 저녁도 먹었으니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어쨌든 그날의 실수에서 얻은 것들도 많다. 인생에 정해진 목표라는 것이 있을까? 삶이란 하루하루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의 만남이며, 끝없는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오히려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 더 문제 아닐까?”

물론 인생은 미리 정해진 궤도만 달리는 기차 여행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일매일이 새로운 서프라이즈도 아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만약 진정으로 확고부동하게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삶의 여정을 중단하는 것 즉,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행복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다. 이 또한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