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2류고 정치는 4류다”…신경영선언 ‘초일류 삼성’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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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2류고 정치는 4류다”…신경영선언 ‘초일류 삼성’ 만들어
이건희 그는 누구인가
1970년대 후계자 경영 수업…하이테크 산업 진출 모색
TV·스마트폰·반도체 등 20여개 품목 글로벌 1위 달성
비자금 수사로 2008년 퇴진…평창올림픽 유치 위해 2년후 복귀
2020년 10월 25일(일) 21:35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와 이건희 회장.
삼성그룹 고(故)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경남 의령 친가로 보내져 할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1947년 상경해 학교를 다녔다. 이후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부친의 엄명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어린시절 영화 감상과 애완견 기르기 등에 심취했고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사대부고 재학시절에는 레슬링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와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1970년대 이 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며 하이테크 산업 진출을 모색했고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그룹 후계자로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삼성의 해외사업추진위원장을 맡아 유공 인수전에 뛰어들었으나 쓰라린 실패를 맛본 이 회장은 삼성 경영권을 승계하기까지 20여년간 우여곡절을 겪었다. 애초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형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호암의 눈밖에 나면서 이 회장이 후계자로 낙점됐다. 1982년에는 양재대로에서 덤프트럭과 교통사고가 나 아찔한 순간을 넘기기도 했다.

2006년 두바이를 방문한 이건희 회장.
1987년 이병철 창업주 별세 이후 그룹회장에 취임한 고인은 1993년 신경영선언을 통해 초일류 삼성의 기틀을 닦았다. 이 회장은 삼성가 분할이 거의 완료된 뒤 삼성전자 임원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발언으로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품질경영, 질경영, 디자인경영 등으로 대도약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회장은 남다른 집념으로 삼성을 키웠다. 1987년 1조원이던 시가총액을 2012년 390조원대로 40배나 성장시켰고 총자산 500조원의 외형을 만들었다. 2006년 글로벌 TV시장에서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고,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시장 1위를 달성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포함해 20여개 품목의 글로벌 1위를 일궈냈다.

2012년 베트남 사업장을 방문한 이건희 회장.
이 회장은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각종 수사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비자금 사건으로 특검 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특검팀에 의해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되자 2008년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등을 발표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재계·체육계 건의로 단독사면된 이 회장은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했고 조직 재정비와 삼성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헌신했다. 삼성전자가 카피캣의 오명을 씌운 애플을 추월하는 데도 고인의 집념이 큰 역할을 했다.

/박기웅 기자 pboxer@·/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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