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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아골타, 요 왕조 멸망시킨 금나라 초대황제

2020년 07월 07일(화) 00:00
<초당대총장>
아골타(阿骨打, 1068~1123)는 금나라의 초대 황제다. 1115년 금 왕조를 건국하고 요 왕조를 사실상 멸망시켰다.

헤이룽장성 하얼빈 동남부 아시허 유역에 살던 완안부(完顔部) 족장 핵리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여진은 요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구분된다. 송화강 서남부에 거주한 숙여진은 요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던 반면 송화강 동부의 생여진은 간접지배 상태에 있었다. 완안부는 생여진의 한 부족으로 할아버지 때부터 주변 부족을 병합해 세력을 키웠다. 아구다는 숙부 영가와 형 오아속을 도와 세력 확충에 기여했다.

1113년 형이 죽자 족장에 올랐다. 여진은 일찍부터 전투에서 용맹해 “여진이 1만이면 절대 싸우지 말라”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1114년 요에 대항해 길림성 남림에서 거병했다. 요는 장기 재위한 도종이 죽고 천조제가 즉위했다. 즉위 초기에는 국정에 관심이 있었으나 점차 수렵과 가무에 빠져들었다. 1115년 아골타가 황제에 즉위하니 태조다. 국호를 금(金) 연호를 수국(收國)으로 정했다. 채취된 사금(砂金)이 완안부의 유력한 산업이었는데 여기서 국호가 유래되었다. 금사(金史)에는 “금은 변하지 않고 깨지지 않는다. 금은 백색이며 완안부는 백색을 중시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동 지역의 황룡부(黃龍府)를 함락시켰다. 요의 천조제는 70만 대군을 편성해 대항했으나 혼동강 주변에서 참패했다. 요양부에서 황룡부에 이르는 요동이 금나라의 판도가 되었다. 거란에 멸망당한 발해국 유민들도 복속하였다. 천조제는 패잔병을 이끌고 상경으로 도망쳤다.

북송의 실세 환관 동관이 사절로 요에 갔는데 요의 국력이 쇠퇴한 것을 목격했다. 귀국전에 연경의 마식을 알게 되어 휘종에게 추천했다. 요에 빼앗긴 연운 16주를 탈환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북송은 마정을 밀사로 금에 파견했다. 마정이 해로(海路)로 금에 갔기 때문에 북송과 금의 맹약을 해상의 맹으로 부른다. 1120년 마식이 직접 금으로 가서 금의 사신과 함께 개봉으로 돌아왔다. 금이 요와 북송을 저울질하다가 북송을 파트너로 결정한 것이다. 요의 천조제가 금 태조를 동회국 황제로 책봉한다는 국서를 보낸 것이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북송과 금과의 동맹 조건은 북송이 요에게 매년 보낸 세폐를 금에 보내고 송과 금이 요를 협공할 때 금이 장성(長城)을 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요를 협공하기 위해 북송이 군대를 동원하는 도중에 강남에서 방납의 난이 발생했다. 15만 군대를 난 진압에 투입했고 요에 대한 공격은 지연되었다. 송은 금에 출병을 요구해 연경을 함락시켰다. 연운 16주 중 연경 이남의 6주는 송에 할양되었지만 연경 이북은 금의 산하에 들어갔다. 금은 출병의 대가로 은 20만냥 비단 30만필 전 100만과 군량 20만석을 요구했는데 북송은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북송은 금에 함락된 연경의 반환을 요구했다. 금은 자력으로 연경을 점령한 것이므로 반환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금 태조는 북송과의 밀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성(空城)을 넘겨주고 성내의 주민과 재화는 모두 금으로 옮겼다. 태조는 병에 걸려 1123년 9월 수도인 상경 회령부로 돌아가던 도중 죽었다. 동생이 뒤를 이으니 태종이다.

요나라가 망한 것은 2년 후인 1125년이다. 1126-27년에는 개봉을 공격해 북송 왕조를 멸망시켰다. 역사상 유명한 정강지변이다. 이로써 금은 만주, 내몽고, 화북 지역을 다스리는 거대한 왕조를 구축했다.

통치 효율화를 위해 여러 명의 발극렬(勃極烈)을 두어 합의제 방식으로 통치했다. 맹안(猛安)모극(謀克) 제라는 새로운 정치·군사 조직을 만들었다. 300호를 하나의 행정조직으로 모극을 만들고 10개의 모극으로 맹안을 조직했다. 이를 통해 통일적인 지배와 중앙집권 강화를 시도했다. 태조는 1119년 완안희윤을 시켜 여진 문자를 만들도록 명했다. 태조는 넉넉한 인품과 강력한 통솔력으로 여진족을 통합해 금 왕조 구축에 기여한 뛰어난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