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237> 고종, 북송 휘종의 아들…남송 초대 황제
2020년 06월 23일(화) 00:00
<초당대총장>
고종(高宗)은 남송의 초대 황제다. 이름은 조구로 자는 덕기(德基)이며 북송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다.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흠종의 아우로 광평왕을 거쳐 강왕(康王)에 봉해졌다. 금이 남침해 수도 개봉을 점령하고 휘종과 흠종이 북으로 끌려가는 정강지변이 발생했다. 강왕은 강남으로 남하해 임안(현 항저우)에서 남송 왕조를 건국했다. 부친과 형이 생존해 있는 까닭에 즉위를 주저했다. 장준은 “왕께서는 황제의 동생이고 민심이 따르고 있습니다. 빨리 즉위하여 천하의 뜻에 부응하십시오.”라고 강력히 권했다. 응천부에서 즉위하니 송 고종이다.

고종은 즉위 초 대금 강경론을 채택해 이강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양국간 전력 격차가 큰 현실을 인식하고 점차 화평론으로 기울었다. 화평론자인 황잠선, 왕백언을 재상으로 기용해 남침에 대비했다. 그러나 지개봉부 종택이 병사하는 등 전열을 제대로 갖출 수 없었다. 결국 장강을 건너 진강으로 내려가고 월주를 거쳐 복건성 온주까지 피신했다. 2년여 월주에 머물다가 1132년 임안으로 귀환했다. 이후 임안은 남송의 수도가 되었다. 1129년 명주 전투는 남방으로 피신하는 와중에 치러진 중대한 전투였는데 장준의 분투에 힘입어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1134년 금이 재차 남침하자 장준, 한세충, 유광세, 악비 등이 회남 전투에서 분전해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휘종, 흠종 두 황제와 함께 북으로 잡혀간 진회가 남송으로 돌아오면서 대금 화의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당초 진회는 대금 강경론자였는데 금에서 역류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나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강경론자들의 공격으로 진회 등 화평파는 정국 주도에 어려움을 겪었다. 1137년 정월 휘종의 사망 소식이 남송에 전달되었다. 이를 계기로 금과 남송간 화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진회는 왕윤을 대표로 보내 금의 실력자 달뢰와 화평 교섭을 타결토록 해 1138년 1차 화의가 이루어졌다. 하남, 섬서 등의 영토를 남송에 반환하고 송황제는 금황제를 신하의 예로 대하며 은 25만냥과 비단 25만필을 세공으로 제공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금 왕실 내부의 정쟁으로 화의가 깨졌다. 종간, 종필 세력은 달뢰, 종반 세력을 모반죄로 몰아 처형하고 남송과의 조약도 무효화하였다. 1140년 5월 종필을 총 사령관으로 한 금군이 재차 남침했다. 금군은 개봉과 장안을 점령하고 장강을 넘어 남송에 진입했지만 악비, 장준, 한세충의 분투로 저지당했다.

주요 장군이 군권을 장악한 관계로 남송 조정은 대금 화의를 제대로 추진하기 어려웠다. 진회는 황제의 허락하에 장준, 한세충을 추밀사로 악비를 추밀부사로 기용해 사실상 병권을 박탈했다. 화의로 기운 장준은 진회에게 적극 협조했다. 진회는 악비를 역모죄로 몰아 처형했다. 가산도 몰수하고 유족을 지방으로 내쳤다. 이로써 화의파가 힘을 얻었다. 금나라도 종간이 사망하고 종필이 군권과 민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양측은 1142년 송·금 화약에 합의했다. 회수를 경계로 삼고 송은 은 25만냥, 비단 25만필을 매년 세금으로 보내기로 했다. 휘종의 관도 돌려보냈다. 이로써 장기간 화평이 유지되었다. 재상 진회는 1155년 사망할 때까지 대금 화해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남송은 회동, 회서, 호광, 사천 네 지역에 총령을 두고 문관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고종은 여러번 금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두 황제의 귀환을 요구했다. 금국기청사(金國祈請使)라는 사절을 대동에 주재한 종한이 도중에 억류시키는 바람에 금 황실에 갈수가 없었다. 고종이 두 황제의 귀환을 간절히 희망했는지도 의문이다. 자신의 즉위 정통성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129년 묘부와 유정언의 군사 쿠데타가 있었다. 어영사 왕연을 죽이고 고종의 퇴위 및 융우태후 맹씨의 섭정을 요구했다. 각지에서 근왕군이 일어나 다시 권좌에 복귀할 수 있었다. 1156년 흠종이 이국땅 오국성에서 죽었다. 1162년 양자인 조신에게 양위하니 효종이다. 태상황제가 되어 1187년 81세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