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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이청조, 중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시인
2020년 05월 26일(화) 00:00
<초당대총장>
이청조(李淸照, 1084~1151)의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로 현 산둥성 제남시에 해당하는 제주 장구 출신이다. 송사(宋詞)를 대표하는 여류 시인이다.

예부시랑을 지낸 부친 이격비는 소식의 제자로 낙양의 정원을 묘사한 낙양명원기(洛陽名園記)를 남겼다. 부친의 가르침 덕에 어려서부터 시작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101년 18세때 금석문 연구가인 조명성과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여러 명문가 집안의 청혼이 성에 차지 않아 거절했는데 조명성이 금석학에 조예가 깊고 언행이 바르다는 말을 듣고 혼인을 결심했다. 남편과 함께 서화·골동품 수집에 푹 빠졌다. 조명성은 매달 이틀씩 휴가를 내 개봉의 상국사에 들러 고서와 골동품을 사들였다. 시아버지 조정지가 권력 싸움에서 밀려 실각하자 남편도 관직에서 물러나 부부가 함께 산둥성 청주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수집한 서적을 정리하는 작업으로 세월을 보냈다. 조명성은 금석학 연구에 매진해 ‘금석록’이라는 저서를 완성했다.

그녀는 권모술수가 능한 시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조정지 또한 고분고분하지 않은 며느리가 맘에 차지 않았다. 조정지가 친정아버지인 이격비를 탄핵하는 일도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남편의 지방 근무로 서로가 떨어져 사는 시간이 많았다. 매화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어가오(漁家傲)는 자신을 잊지 말고 사랑해 달라는 고백시로 남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내용이다. 취화음(醉花蔭)이라는 시도 떨어져 있는 남편에게 보낸 시다. 시를 받아 본 조명성은 자신이 지은 시구와 함께 친구 육덕부에게 가장 잘 된 것을 뽑아달라고 요청했다. 육덕부는 이청조가 쓴 취화음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3구절이 제일 좋다고 평가했다. “영혼을 상하게 않는다고 말하지 마시오. 주렴을 거두니 가을 바람 부네. 사람이 국화보다 더 야위었구나.”

1125년 금나라가 북송을 침략했다. 개봉이 함락되고 휘종과 흠종은 북쪽으로 끌려가고 북송은 멸망했다. 조명성의 고향 청주도 함락되었다. 부부는 강남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수집한 진귀한 서화와 골동품을 모두 남겨둔채 일부만 가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심정을 이청조는 금석록 후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금의 도적떼들이 개봉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했다. 집안 가득 쌓여 있는 금석문과 고서화를 생각하니 애가 타고 슬펐다. 더 이상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황실은 강남으로 내려가 남송 왕조를 세웠다. 1128년 초봄 남송 고종 2년 강녕의 지부로 부임해 있던 남편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1129년 고종은 조명성을 건강으로 불렀다. 폭염에 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정성껏 치료를 하였지만 그해 8월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오랜기간 병고를 치렀다. 금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에 금석문과 고서화를 강서의 홍주로 옮겼으나 금군이 홍주를 침공해 귀중한 재물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생 이항과 함께 항주로 피난간 연후에야 생활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때 쓴 대표적 시가 영우락(永遇樂)이다.

남편 친구인 장여주가 청혼하자 받아들여 새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장여주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재물에 관심이 있던 속물이었다. 폭력도 일삼았다. 결국 관청에 장여주를 고발했다. 장여주는 유주로 유배되었고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녀의 재혼설에 대해서는 청나라 유장섭, 이자성은 근거 없다고 일축했다. 그녀의 뛰어난 재주를 시기한 일부 문단의 낭설이라고 주장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성성만(聲聲慢)은 이때 지어진 대표작이다. 자신의 몰락한 처지에 대한 한탄이 담겨 있다.

그녀가 어디에서 생을 마감했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녀는 송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남송의 대표적 시인이다. ‘중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도 남성의 부속물에 불과한 여성의 신분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실력과 재주로 우뚝 선 신여성이다. 주체적 삶을 살아간 개성있는 문인의 한명으로 중국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