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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세탁기가 주부를 가사노동서 해방시켰다고?
세탁기의 배신
김덕호 지음
2020년 05월 08일(금) 00:00
가전제품이나 기술이 도입됐어도 가사노동시간이 늘었다는 것은 가사노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대안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1920년대 증기 세탁소 장면. <뿌리와 이파리 제공>
어떤 이는 집안일을 “해도 티가 안 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가정주부의 하루는 티가 안 나는 일의 연속에 다름 아니다. 그만큼 전업주부는 단 하루도 집안일에서 해방되기가 어렵다.

2018년 우리나라가 가사노동을 시장가격으로 환산한 적이 있다. 통계청은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2014년 기준 연봉으로 계산할 경우 ‘무급’ 가사노동의 1인당 시장가격이 710만8000원이라고 발표했다. 이를 전체 국민으로 계산하면 360조7300억원으로 여성이 272조4650억원, 남성은 88조2650억원에 달했다.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4.3%에 달하는 수치다.

잠시 일반적인 전업주부의 오전 일과를 그려보자. 아침애 토스트를 굽거나 전기밥솥에 밥을 한다. 간단한 음식의 경우 가스레인지를 돌려 뎁히기도 한다. 식사가 끝나면 남편과 아이들은 직장과 학교로 향한다. 이때부터 주부의 본격적인 일과가 시작된다. 설거지와 음식쓰레기를 분리하고 이후 구석구석 집안 청소를 한다. 널브러진 옷가지를 세탁기에 넣고 집안을 정리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주부의 이러한 일과는 대체로 가전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진행된다. 다시 말해 가전제품, 즉 가사기술을 이용할 수 없다면 일상을 꾸려가기 힘들다.

그런데 가전제품의 편리와 효율은 오히려 더 많은 일을 안겨준 측면이 있다. 세탁기가 더 많은 빨랫감을, 레인지가 더 많은 요리를 강제한다는 의미다. ‘욕망의 코카콜라’의 저자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 교양학부 교수가 펴낸 ‘세탁기의 배신’은 가사기술이 여성들을 과연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켰는지를 반문한다.

저자에 따르면 가전제품은 여성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역설적으로 다른 일거리를 안겨주었다. 가사노동의 강도를 줄인 대신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지겨운 일과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저자는 1920년대 미국의 가전제품 광고가 주부의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켰는지 들여다본다. 사실 가사기술의 능력과 연계된 이상적인 여성상은 지극히 고전적이다. 즉 바깥에서 고군분투하고 돌아온 남편을 위해 집을 천국 같은 안식처로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책에는 당시 미국의 시대별 인구센서와 잡지 광고를 통해 트렌드를 분석한 내용이 나온다. 한편으로 가사기술에 대한 연구, 서구 페미니즘이 가사기술에 끼친 영향도 개괄한다. 분명한 것은 가전제품들이 줄줄이 도입됐는데도 여성들의 가사노동시간은 여전하거나 오히려 더 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명비평가 이반 일리치는 주부들의 가사노동을 ‘그림자 노동’(shadow works)로 정의했다.

“그것에는 여성이 가정이나 아파트에서 행하는 대부분의 가사, 쇼핑에 관계되는 여러 활동, 집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위하며 주입식으로 공부하는 것, 직장을 왔다갔다 하는 통근에 드는 수고가 포함된다.”

다시 말해 그림자 노동은 청소, 빨래, 다림질, 음식하기, 설거지, 육아, 양육 등과 연계된 가사노동을 일컫는다. 가족에 대한 희생으로 무임금이 정당화되는 시작과 끝이 없는 노동이다. 편리한 가전제품이 지속적으로 출현해도 가사노동이 그림자노동을 벗어날 수 없는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남편과 자녀들의 가사노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

“오늘날 미국 사회건 한국 사회건 가부장제가 많이 부식되었지만 여전히 아내와 주부는 끊임없이 감정을 소비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가정을 유지하는 데, 아이를 돌보는 데 사용하고 있다… 가정에서 계속적으로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거나, 더 많이 구입하거나, 더 크게 집을 넓힌다면 가사노동시간의 감소로 인한 여가시간의 증가 혹은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는 여유로운 삶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뿌리와 이파리·1만80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