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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휘종, 북송 8대 황제…정사 외면 왕조멸망 초래

2020년 04월 14일(화) 00:00
<초당대총장>
휘종(徽宗, 1082~1135)의 이름은 조길로 북송의 8대 황제다. 정사를 도외시하고 문화예술에 탐닉해 사실상 북송의 멸망을 초래했다.

6대 황제 신종의 열한번째 아들로 7대 철종의 아우다. 1085년 철종으로 즉위한 형 조후가 붕어하자 신종의 황후 상씨 지지에 힘입어 1100년 황제로 즉위했다. 철종이 죽자 재상 장돈은 철종의 동복 동생인 단왕을 추천했으나 황태후는 단왕 조길을 후계자로 낙점했다. 장돈은 단왕이 경박해서 황제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단왕의 경박함이 왕조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1102년 채경을 재상으로 기용하고 신법을 다시 추진했다. 이에 따라 신법당 인물이 대거 발탁되었다. 채경은 그후 16년간 재상으로 재직하면서 구법당을 탄압하고 휘종의 사치와 방종에 적극 협조했다. 서화에도 능해 휘종의 신임을 듬뿍 받았다. 휘종이 신임하는 환관 동관의 지원으로 재상으로 복귀했다. 서화와 시문에 능한 휘종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채경과 동관에게 정치를 사실상 위임했다.

신법 중에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이 있는데 대지주가 은닉하고 있는 토지를 찾아내 세금을 징수하는데 목적이 있다. 토지를 측량해 숨겨진 전답을 찾아서 추가 세수 확보가 이루어졌다. 대지주가 크게 타격을 받았다. 공전법(公田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만들어 세금을 거두었다. 전답을 측량하는 방식을 변경해 토지 면적이 1무(畝)가 넘는 것은 공전으로 몰수했다. 지주들의 타격이 컸다.

개봉을 강남처럼 문화와 경관의 도시로 만들려는 의도로 강남에 있는 진기한 나무, 꽃, 돌, 바위 등을 대거 개봉으로 옮겨왔다. 특히 태호(太湖)의 물속에 있는 태호석에 집착했다. 강남에서 개봉으로의 운반에 엄청난 인력과 재정이 소요되었다. 백성들의 원망과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소설 수호전(水滸傳)의 시대적 배경이 휘종 치세이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끝없이 일어났다. 1120년 절강성에서 일어난 방납의 난이 대표적이다. 환관 동관의 정부군에게 진압되었지만 사실상 북송의 숨통을 끊는 반란이었다.

도교에 심취해 스스로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라 칭했다. 천하에 도교의 선경을 구하는 명령을 내렸다. 천도회라는 대규모 도교 의식을 행했는데 엄청난 국고가 탕진되었다. 1114년에는 도계(道階) 26급을 설치했다. 도교 경전의 수집과 도관 건설이 활발히 집행되었다. 재정이 급속히 고갈되었다.

틈나면 궁을 떠나 미행 잠복하여 개봉의 유곽에 출입하였다. 사료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인생은 한순간,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지 않으면, 나이 들어 후회할 따름입니다. 신하의 간언 따위에 신경 쓰지 마시고 뜻대로 즐기시옵소서.” 개봉의 명기 이사사(李師師)가 휘종의 단짝이었다.

1115년 여진족 아골타가 금(金)을 세웠다. 휘종은 마정을 금에 파견해 요나라 협공을 교섭했다. 1120년 종래 요에 제공했던 세폐를 금에 제공하기로 해 동맹이 성립되었다. 협공할 때 금은 만리장성을 넘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1123년 금과 송의 협공으로 사실상 요나라가 멸망에 몰렸다. 금은 산서성 대동을 넘어 연운 16주를 거의 장악했다. 송은 금에게 연경의 반환을 요구했다. 금의 태조는 송과의 협약을 지켰다. 연경 반환 직후 태조가 죽고 동생이 태종으로 즉위했다. 송은 금이 점령한 대동을 탈환하려고 요와 비밀 협약을 맺었는데 1125년 요의 황제가 금군에게 생포되고 비밀문서도 발견되었다. 격노한 금은 대군을 동원해 송을 토벌했다. 연경을 지키던 곽약사가 금에 투항했다. 휘종은 깜짝 놀라 퇴위하고 1115년 태자로 책봉한 장남 조환에게 황위를 넘겼으니 흠종이다. 1126년 휘종은 태상황이 되어 강남 진강으로 도주했고 흠종은 금과 협약을 맺어 연경 포위를 풀었다. 그러나 개봉에서 주전론이 다시 일어났다. 금은 다시 개봉을 함락시켰다. 휘종과 흠종은 금의 포로가 되었다. 1127년 송왕조가 멸망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정강지변(靖康之變)이라고 한다. 휘종은 만주로 이송되어 시력을 잃고 1135년 오국성에서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