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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를 기억하는 여행…평화와 인권을 다시 일깨우다
민간학살 추념 ‘제주4·3평화공원’
교육의 장 ‘너븐숭이 4·3기념관 ’
암매장터로 이용했던 일제 탄약고
성산리 ‘터진목’ 입구에 위령비 등
6년 6개월간의 비극 유적으로 남아
2020년 04월 09일(목) 00:00
4·3평화공원에는 타 지방 형무소로 끌려간 후 행방불명된 이들을 추모하는 묘역이 설치됐다.
유채꽃이 만발한 제주의 4월. 72년 전 봄에도 꽃은 피었지만 도민들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까지 6년 6개월 동안 전개됐다. 섬 곳곳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주 전체 인구의 약 30만명 중 10%인 3만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됐다. 또 중산간마을 95%가 소실됐다. 4·3의 비극과 아픔은 600여 곳의 유적으로 남았다.

유적을 방문하는 4·3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은 과거를 반성하고,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3만명에 이르는 4·3희생자와 행방불명인을 기리기 위해 2008년 3월 문을 연 제주4·3평화공원 전경.
◇제주4·3을 알려면 4·3평화공원으로

2008년 3월 개관한 제주4·3평화공원은 4·3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고 있다. 전체 면적은 39만5380㎡로 위령제단에서는 연중 4·3희생자에 대한 참배가 이어진다. 위패봉안실에는 1만4532명의 희생자의 위패가, 행방불명인 묘역에는 3913명의 비석이 들어섰다.

1949년 1월 6일 변병생(당시 25세)과 그녀의 두 살배기 딸은 4·3평화공원 인근 봉개동 오름에서 군인들에게 쫓기던 중 총에 맞아 숨졌다. 후일 눈 더미 속에서 발견된 어머니는 죽어가는 순간까지 아기를 꼭 껴안고 있었다. 공원에는 죽어간 두 생명이 거센 바람에 흩날리는 눈과 같다는 의미로 ‘비설(飛雪)’이라는 조형물이 세워졌다.

4·3평화기념관에는 6개의 상설전시관이 있다. ‘역사의 동굴’을 시작으로 ‘흔들리는 섬’, ‘바람타는 섬’, ‘불타는 섬’, ‘흐르는 섬’, ‘새로운 시작’으로 구성됐다. 비문 없는 비석, 해원의 퐁낭(팽나무), 희생자들의 얼굴 사진이 내걸린 전시물은 관람객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다랑쉬 특별전시관’은 4·3당시 동굴 속에 숨은 아홉 살 아이와 여자 셋을 포함한 양민 11명이 군·경 토벌대가 피운 연기에 질식사한 비극의 현장을 보여준다.



◇446명의 넋을 기리는 너븐숭이 4·3기념관

1949년 1월 17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서는 한날한시에 남녀노소 446명이 희생됐다. 북촌리 마을은 4·3당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이날 오전 군 병력 일부가 북촌리를 지나던 중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숨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군인들은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내몰고 마을을 불태웠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빨갱이 가족’이라며 한꺼번에 수 십 명씩 끌고 나간 후 기관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했다. 한 어머니는 아기를 안은 채 숨졌지만, 배고픔에 울던 아기는 죽은 어머니의 젖가슴에 매달려 젖을 빠는 비극적인 목격담이 나왔다.

집단 학살을 당한 북촌마을은 후손이 끊기면서 한 때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렸다.

2009년 제주도는 2532㎡ 부지에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294㎡)과 위령성지를 건립했다.

기념관에는 강요배 화백의 4·3그림 ‘젖먹이’, 북촌리의 비극을 배경으로 한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 초판본과 일어판·영어판 소설이 전시됐다.

당시 아이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다. 너븐숭이에 있는 돌무덤은 ‘애기무덤’이라 불린다. ‘너븐숭이’는 넓은 돌밭을 뜻하는 제주방언이다.



◇일제가 남긴 지하 탄약고…양민 학살터로 사용

태평양전쟁(1941~1945년)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에 알뜨르비행장을 확장, 조성했다. 전투기 격납고 19개는 지금도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전쟁 막바지에는 비행장을 요새화하기 위해 섯알오름 동굴진지와 고사포진지가 구축됐다.

당시 일본군은 야트막한 섯알오름의 내부를 전부 파내 탄약고로 사용했다. 이 지하 탄약고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이 때 오름의 절반이 함몰돼 큰 구덩이가 생겼다. 이 구덩이는 4·3이후 예비검속 당시 주민을 학살, 암매장한 장소로 이용됐다.

당국은 1956년 5월 모슬포지역 희생자 132명의 유해를 수습하도록 허가를 내줬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희생자의 신원은 확인하기 어려웠고, 유족들은 흩어진 뼈를 추슬러 무덤을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조상은 100명이 넘되 자손은 하나’라는 의미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地)’라고 새겼다.

6·25전쟁이 한 창일 때 제주는 4·3사건이 진행 중이었지만, 1951년 1월 대정읍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창설됐다. 1956년 문을 닫을 때까지 5년 간 장병 50만명을 배출했다.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터진목’ 해안에서는 467명의 양민이 학살됐다.
◇성산일출봉 푸른 바다가 붉은 피로 물들어

서귀포시 성산읍은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 마을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서청 특별중대는 성산초등학교를 접수해 1년간 주둔했다. 이들은 군복만 입었을 뿐 명찰과 계급장이 없었다. 학교 건물에서 숙식하던 이들은 학교 옆 감자창고에 주민들을 붙잡아 온 후 매일 고문을 자행하면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젊은 여성에게는 몹쓸 짓도 서슴치 않았다.

이들은 주민들을 고문한 후 대부분 총살했다. 학살 장소는 성산리의 ‘터진목’과 성산일출봉 입구에 있는 ‘우뭇개동산’이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이곳에서 집단 학살된 희생자는 467명에 이른다. 푸른 바다는 매일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성산읍 4·3유족회는 2010년 터진목 입구에 위령비와 함께 467명의 희생자 이름을 새겨놓았다.

백가윤 제주다크투어 대표는 “제주지역 4·3유적은 600곳이 넘지만 관리가 제대로 안되면서 잊혀져가고 있다”며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 제주에선 4·3사건이 진행됐는데 올해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4·3과 전쟁 유적을 함께 돌아보는 4·3기행을 추천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제주4·3사건이란



1945년 광복을 맞아 일본에서 귀환한 제주도민은 6만명에 이르면서 실직난과 생필품이 부족해 졌다. 여기에 콜레라 창궐, 대흉년, 양곡정책 실패 등 어려 악재가 겹쳤다.

미군정이 통치하면서 일제 경찰은 군정 경찰로 변신했고, 군정 관리의 부정·부패는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1947년 3·1절 기념식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가두행진이 이어졌다.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포하면서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유혈 진압에 반발해 그해 3월 10일 공무원과 교사, 학생, 회사원 등 민·관 사업장 95%가 참여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총파업을 벌인 2500여 명을 구금했고, 이 중 3명이 고문으로 사망, 도민들은 더욱 반발하게 됐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여 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를 공격했다. 유혈 사태는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풀릴 때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돼 많은 양민이 희생됐다.



/제주신보 좌동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