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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쉬리’와 한국의 대작영화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 영화판을 키우다
IMF 경제 침체 시기…당대 최고 한석규 출연 소식에 투자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로 최민식·송강호·김윤진 등 캐스팅
새로운 장르·특수효과 향상 … 관객층 확대·도전 기폭제로
1999년 개봉 국내 이어 日서도 흥행…금융자본 충무로 유입
한국영화 사상 첫 1000만 실화 바탕 ‘실미도’ 제작 교량 역할
2019년 12월 04일(수) 04:50
1999년 2월 13일 ‘쉬리’가 개봉했다. 그리고 ‘쉬리’는 한국영화의 중요한 한 획을 그은 것은 물론 한국영화산업의 전기를 마련한 영화가 되었다.

1년 전 개봉한 ‘타이타닉’이 세운 흥행기록을 갱신한 것도 그렇고, ‘타이타닉’으로 대변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필적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증명해낸 것도 그렇다. 그리고 ‘쉬리’는 단순한 흥행작이 아니라 IMF로 침체에 빠져 있던 한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성공 사례와도 같았다.

‘쉬리’ 이전에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영화는 ‘퇴마록’(1998)이었다. ‘퇴마록’은 스스로를 한국형 블록버스터라고 홍보했고, 거액의 마케팅비용과 대규모 전국 동시개봉을 추진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의 관객동원에 실패하며 블록버스터 전략을 완벽하게 성공시키지는 못했다. 그렇게 ‘퇴마록’의 실패는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한국영화산업의 현실에 맞지 않는 방법론이 될 뻔했다.

강제규 감독


그러나 ‘쉬리’는 한국에서도 블록버스터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내며 한국영화산업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쉬리’의 제작발표회에서 강제규 감독은 “할리우드에 대적할 만한 한국형 액션 블록버스터를 만들겠다”는 출사표를 던졌고, 보기 좋게 만루 홈런을 날린 것이다. 그렇게 강제규감독은 한국영화도 할리우드영화처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영화인들에게 안겨주었고, 하루아침에 최고의 감독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쉬리’의 탄생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을 당시 대한민국은 ‘금 모으기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작영화에 선뜻 큰돈을 내어 줄 기업은 없었다. 강제규 감독은 ‘은행나무 침대’(1996)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IMF상황은 대작에 대한 투자를 멈칫거리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대의 흥행보증수표였던 한석규는 ‘쉬리’에 출연하겠다고 나섰다. 이 소식은 삼성영상사업단이 투자를 결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 ‘쉬리’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시기 한석규는 최고의 스타였다.

‘쉬리’는 흥행할 만한 요소가 많은 영화였다. 먼저, 월드컵 공동 개최를 앞두고 화해 무드에 있던 남과 북이 신종 액체폭탄을 사이에 두고 첩보전을 펼치는 숨 막히는 이야기는 관객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김윤진 등의 호화 캐스팅과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를 보고 조연과 단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했던 수많은 배우들의 연기앙상블은 ‘쉬리’의 작품성을 높여 주었다.

여기에다 한석규와 김윤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는 다양한 관객층을 포섭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석규가 자신의 애인인 김윤진이 남파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눠야 하는 비극의 아이러니는 이 영화의 정점이었다. 이밖에도 ‘쉬리’는 물량공세에 있어서도 대단했다. 대규모 폭파장면, 도심총격전, 헬기추격 장면 등 전쟁영화를 방불케 하는 스펙터클은 한국영화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진풍경이었다.

이렇듯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기술로 한국적 소재를 가공한다는 이 영화의 전략은 한국영화가 나아가야 할 모범적인 방향으로 여겨졌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특히 이 영화가 당시까지는 난공불락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일본시장에서 흥행성공을 거둠으로써 이러한 기대는 단순한 기대의 수준을 넘어서 확고한 믿음으로 발전했다.

‘쉬리’ 이후 한국영화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30년 가까이 지속된 장기 침체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던 상황에서 “파이를 늘려야 한다”는 강제규 감독의 말은 패러다임이 되었다. 그러니까 ‘쉬리’로 영화의 산업적 잠재력이 증명되면서 좀 더 큰 자본의 유입이 가능해졌다.

‘쉬리’의 성공은 한국영화의 상품가능성을 증명해 금융자본의 충무로 진출 타진에 먹음직한 유인책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국영화는 큰 규모의 영화들이 우후죽순 만들어지게 된다. ‘단적비연수’(2000), ‘리베라 메’(2000), ‘비천무’(2000),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1),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 ‘예스터데이’(2002), ‘아유레디’(2002) 등이 바로 이 시기에 쏟아져 나온 거대 예산의 영화들이다. 하지만 이들 영화들은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비평적 차원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쉬리’가 스펙터클과 뛰어난 이야기 구조를 절묘하게 결합시켰다면 대부분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은 특수효과를 이용한 볼거리에 치우친 나머지 튼튼한 이야기구조가 결여된 함량미달의 영화들이었다.

‘쉬리’의 성공사례를 보고 덤벼들긴 했지만 대규모 자본을 이용해서 영화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 한국영화는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규모의 경제를 통해서 한국영화시장의 규모를 키우고, 세계시장에 진출하기를 바랐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소망은 오히려 한국영화에 대한 투자의 급감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런 흐름 속에서도 블록버스터를 표방하지 않았던 작품들인 ‘공동경비구역 JSA’(2000)와 ‘친구’(2001)는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한국영화의 저력을 이어나갔고, 한국영화의 첫 ‘1000만 영화’인 ‘실미도’(2003)가 만들어지는 교량 역할을 했다.

‘쉬리’의 성공은 새로운 장르 개척이나 특수효과 기술 향상 등의 측면에서 한국영화산업에 적잖은 파고를 일으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영화의 관객층을 넓힌 점은 중요한 성과로 꼽을 만하다. 한국영화를 보겠다고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늘어나는데 ‘쉬리’가 기여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쉬리’의 성공은, 이후 한국영화의 도전과 확장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2000년대 중반에 정점을 찍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 대 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