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 생각’] 오동나무 낙엽에 담긴 가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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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 생각’] 오동나무 낙엽에 담긴 가을의 전설
2019년 10월 31일(목) 04:50
나무는 계절의 흐름을 가장 빠르고 선명하게 보여 준다. 절정을 이룬 단풍 숲으로 스미는 바람결에 가을이 담겼다. 어느 때보다 나무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는 계절이다. 나무가 보여 주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도로를 메운다.

그러나 나무에게 허락된 천연색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자연이 빚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다양한 빛깔을 드러낸 단풍은 아름답지만 곧 시들어 떨어져야 한다. 이별과 조락이 전제된 아름다움이어서 단풍은 안타깝다. 나뭇잎에 오른 단풍 빛깔이 아름답다는 건 낙엽 채비를 마쳤다는 신호다. 나뭇가지에서 탈락한 나뭇잎은 낙엽 되어 다시 태어날 새 생명을 위해 거름으로 돌아간다. 이 가을, 나무는 이 땅의 모든 생명에게 순환의 지혜를 말없이 보여 준다.

가을바람 따라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나뭇잎들이 천천히, 빠르게, 혹은 멈칫멈칫 떨어진다. 이 땅의 모든 나무 가운데 오동나무 낙엽은 가을의 대표적 상징이다. 허공에 추락하는 ‘오동나무 한 잎’은 쓸쓸한 가을 풍경의 백미다. 세상살이의 시름을 모두 담아낼 만큼 너른 잎 때문이다. 예로부터 오동나무 잎 떨어지는 풍경은 깊어 가는 가을의 상징이었다. 이 땅의 가을 밤을 오동추야(梧桐秋夜)로 표현한 것도 그래서다.

옛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 시집갈 때까지 한 그루의 오동나무를 잘 키워 장롱 한 채 지어 주겠다는 마음이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혼사를 치렀던 옛날에 장롱 한 채 짓기 위해 오동나무를 심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오동나무가 장롱과 같은 가구를 짓는 데에 더 없이 좋은 재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빨리 자라는 속성수라는 이유가 더 컸을 게다.

오동나무의 잎은 여느 나무에 비해 무척 넓다. 플라타너스·튤립나무와 같은 몇몇 외래 식물을 제외하면 이 땅의 나무 가운데 가장 큰 잎을 가졌다. 따라서 광합성으로 지어내는 양분의 양도 많을 수밖에 없다. 초록의 넓은 잎으로 지칠 줄 모른 채 이어 온 광합성은 오동나무를 여느 나무보다 빨리 자라게 한다. 그야말로 쑥쑥 큰다. 멀지 않아 떠나게 될 딸아이를 평안한 마음으로 보내기 위해 짧은 시간 안에 채비해야 한다는 아비의 초조한 마음을 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곰곰 따져보면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아 혼사를 치러야 했던 시절에 혼수로 오동나무 장롱 한 채를 짓는 건 언감생심이다. 아무리 빨리 자라는 속성수라 해도 십여 년 만에 장롱을 지을 만큼 넉넉한 양의 목재를 생산해 내지는 못한다. 옛 아비들이라고 그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딸아이를 생각하고 아비는 오동나무를 심었다. 어차피 언젠가 떠나야 할 딸아이의 평안한 훗날을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까닭이다.

가구재 뿐 아니라, 옛 악기에도 오동나무는 최상급의 재료였다. 거문고와 가야금은 물론이고, 장구 역시 오동나무로 만든 통을 ‘오동통’이라 부르며 최상급으로 쳤다. 오동나무는 사람들의 그 많은 쓰임새를 위해 봄부터 그리 너른 잎을 내고 수굿이 양분을 지어 내 제 몸집을 키워 왔던 것이다.

오동나무는 살아 있는 동안 나뭇잎에서부터 나무줄기까지 요긴하게 쓰인다. 사람들에게 더 많이 더 긴하게 쓰이기 위해 힘겨울 정도로 큰 잎을 돋워 내고, 봄부터 단풍 든 가을까지 양분을 지어 몸피를 키웠다. 가을바람 서늘해지자 제 할 일을 다한 나뭇잎은 창졸간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돌아온 곳, 흙으로 돌아갈 채비를 모두 마쳤다.

돌아갈 곳을 잘 아는 것은 모든 생명이 갖추어야 할 지혜다. 온갖 말들을 아무런 책임도 없이 내뱉어 놓고, 되돌아갈 자리를 찾지 못해 헤매는 한없이 무지몽매한 이 땅의 인간들이 편을 갈라 벌이는 말놀음의 정치 행태를 바라보자니, 들고 남의 지혜를 완벽하게 갖춘 가을 나무의 낙엽이 새삼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오동나무 넓은 잎이 한 잎 두 잎 낙엽하며 사람의 마을에 던져 오는 생명의 지혜가, 이 땅의 말 많은 정치인들에게 던지는 침묵의 웅변이, 벼락같은 야단으로 다가오는 가을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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