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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돕지 못한 그날의 기억 평생 죄책감으로 남아”
한국인들 5·18 나보다 더 몰라
북한군 투입설까지 나와 충격
진실 알리기 위해 책 집필 중
2019년 05월 14일(화) 00:00
미국평화봉사단원 출신 폴 코트라이트씨가 최초 공개한 5·18 당시 광주~나주간 차단지점 사진. 5·18 진압군이 군용트럭과 민간 택시를 이용해 도로에 차단시설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폴 코트라이트씨 제공>






“왜곡된 5·18 민중항쟁을 미국인의 시점으로 바로잡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집필 중인 책 가제도 ‘광주의 목격’입니다.”

지난 12일 오후 광주시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 6층에서 만난 폴 코트라이트(63·Paul Courtright)씨는 유쾌한 웃음과 함께 “안녕하세요”라고 유창한 한국말로 취재진과 인사를 나눴다. 미국인인 그는 1980년 5·18 민중항쟁 당시 광주와 나주 등을 오가며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소속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다.

이번 광주 방문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머뭇거림 없이 광주와 5·18을 입에 올렸다. 39년 전 1980년 5월 당시 고조된 반미 감정 속에서도 자신을 보호해 준 광주시민의 따뜻한 정에 대한 얘기도 꺼냈다. 3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킬리만자로 안(眼) 보건센터장을 끝으로 퇴직한 폴씨는 39년 전 광주에서 겪은 기억을 토대로 5·18 민중항쟁에 관한 책(가제 ‘광주의 목격’)을 집필 중이라고 했다.

폴씨는 “당시 광주에서 끔찍한 일을 직접 목격하고도 제대로 돕지 못했다”면서 “생과 사를 오가는 광주시민의 모습을 보고 외면하기도 했다. 이 같은 기억 때문에 평생을 괴로움과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광주시민에게) 빚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1년 반 전부터 책 쓰기에 나선 것”이라고 집필 배경을 설명했다. 이번 광주 방문도 마무리 단계에 있는 집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기억 찾기’의 하나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폴씨는 다만 애초엔 5·18 민중항쟁을 서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목적이었지만, 이번 한국 방문을 계기로 글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39년이 지났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조차 내가 보고 겪은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데다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현실, 그리고 북한군 투입설까지 이야기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서구 사람들보다 한국인들에게 미국사람의 시각에서 경험했던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폴씨와 광주의 인연은 봉사라는 단어가 시작점이다. 외교관을 꿈꾸며 미국 북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폴씨는 대학 진학 후 외교관의 삶을 ‘규격에 갇힌 삶’으로 느껴 평화봉사단에 지원하게 됐다고 한다. 평화봉사단은 아시아에 관심이 많던 그를 1979년 한국으로 보냈고, 나주군 남평면의 한센병 환자 수용시설인 ‘호혜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광주식 반찬을 너무나 좋아했다는 폴씨는 나주 남평과 광주를 수시로 오갔고, 제2의 고향이 광주라는 말을 입버릇 처럼 얘기했다고 한다.

아직도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1980년 5월 광주의 그날, 폴씨는 남평이 아닌 광주에 있었다고 한다. 1980년 5월 19일 광주 터미널에 도착한 그는 터미널에서 군인이 어린 학생을 때리는 것을 목격한다.

폴씨는 “학생이 시체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선 도와야 한다는 울림이 있었지만, 정작 공포감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면서 “당시 장면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고, 그 상황을 막지 못한 죄책감은 지금까지 남아있다”며 고개를 떨궜다.

남평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이틀 뒤인 21일 ‘광주에서 큰일이 벌어졌다’는 평화봉사단 친구 팀 완버그의 말을 듣고 자전거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가 평생 잊지 못할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서울에 있는 평화봉사단 본부를 찾아간 그는 짐 메이어 본부장과 함께 미국 대사관을 방문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폴씨는 “2시간 이상을 기다렸지만 결국 숙소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숙소에 도착해서도 광주에서 겪은 일들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면서 “언젠가는 광주의 아픔을 전세계에 전해야 겠다는 생각에 기록으로 남겼고, 서든 캘리포니아 대학의 한국관련 자료실에 가지고 있던 모든 자료와 스캔본을 기증했다”고 말했다.

폴씨는 39년이 흐른 지금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다가오느냐는 질문에 “다채로운 감정이 순식간에 지나간 현장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짓밟힌 광주는 분노했으며,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해 슬픔의 공간으로 변했고, 진압군이 철수하자 축제의 장으로 바뀌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폴씨는 또 “당시 외국인으로서 치안과 질서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두려움이 있었지만 오히려 광주는 질서가 잡히고, 모든 광주시민이 외국인인 저를 더욱 반기는 새롭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면서 “시민들 스스로 질서를 지키는 가운데 도청 앞에서 현수막을 걸고 토론하고, 길가에서는 밥을 나눠주는 모습에서 힐링 프로세스를 느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