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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의 유럽 예술기행] <12> 헝가리-부다페스트
상트 플로리안 성당에서 유럽기행을 마무리하다
9세 때 연주회 연 ‘피아노 왕’ 리스트
돼지치기 소년에서 노동자 시인으로
굴곡진 삶 속 서른둘에 생 멈춘 아틸라
성당으로 무거운 발걸음 옮기고
브루크너 연주 기다리는 아내
나는 300년 된 도서관에 더 관심
2018년 12월 18일(화) 00:00
오스트리아에 온 지 열하루가 지나고 있다. 그동안 빈 시가지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빈 시민들을 많이 마주친 듯하다. 공원에서 본 임산부들과 뛰노는 아이들이 빈의 문화유물 못지않게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사라져가는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아이들의 천국이랄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남은 여정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여행과 하루를 더 머문 뒤,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를 성장케 한 상트 플로리안 성당 탐방만 남은 것 같다. 며칠 전에 프라하를 함께 갔던 이군이 부다페스트를 안내해 주기 위해 또 와 있다.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한 경험 때문인지 이군에게는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다. 빈에서 부다페스트까지는 2시간이면 갈 수 있단다. IMK 회사 음악연주 일로 부다페스트에 여러 번 갔다고도 한다.



강변 언덕에 있는 ‘어부의 요새’에서 본 부다페스트 시와 도나우 강.




“도나우 강 오른쪽의 부다와 도나우 강 왼쪽의 페스트가 1873년에 합쳐서 된 도시가 부다페스트입니다. 인구는 대전시 정도이고 역사는 아주 오래됐습니다. 원래 조상은 훈족(흉노족)과 마자르족이고 일곱 나라에 둘러싸여 외세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입니다. 서로마, 몽고, 오스만터키, 합스부르크, 독일침공, 소련진군 등 계속해서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부다페스트에는 역사유물이 적잖게 보존돼 있습니다.”

두어 군데 휴게소를 들렸는데 어느 새 부다페스트가 눈앞에 나타나 있다. 이면도로 주차장에 겨우 주차를 하고 한숨 돌린다. 고풍스런 건물이 즐비하지만 칙칙한 느낌이 든다. 사회주의 그늘이 아직도 드리워져 있는 듯하다. 얼룩무늬 군복 같은 옷차림의 여성들이 간간히 눈에 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슈가 거리에 있는 리스트박물관.

‘피아노의 왕’ 혹은 ‘교향시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프란츠 리스트(1811~1886). 오스트리아 외딴 시골 라이딩에서 태어난 리스트 페렌츠(헝가리식 이름)는 여러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9세 때의 연주회 성공으로 6년간 귀족으로부터 학자금을 후원받았고, 빈으로 가서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고 한다. 12세 때 연주회에서는 베토벤이 참석하여 격려했고, 슈베르트를 만나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후 파리로 가서 런던 등 연주여행을 하다가 16세 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충격 받고는 슬럼프에 빠졌다가 20세에 다시 파리로 돌아가 쇼팽, 샤토브리앙, 조르주 상드 등을 사귀었으며 백작 부인 마리 다구를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녀가 낳은 딸 코지마는 바그너와 결혼한다. 리스트의 연주여행은 28세부터 다시 활발해졌고 31세에는 바이마르 궁정음악 감독 겸 지휘자가 되어 매년 3개월씩 머무르며 연주했는데 이때부터 리스트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37세에는 아예 바이마르에 이주하여 열정적으로 창작활동을 하며 비트겐슈타인 백작부인 카롤리네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50세 때 로마 교황에게 정식 결혼허가를 받으러 갔다가 파국을 맞이한다. 이러한 충격으로 머리를 깎고 성직자가 됐다가 60세 때 고국 헝가리 왕으로부터 국립 음악학교의 개혁을 의뢰받고 부다페스트 음악학교 교장에 임명된다. 이를 계기로 고국에서 연주와 음악교육 활동을 펼쳐져 간다. 딸 코지마의 남편이었던 바그너는 리스트와 음악의 동반자. 그런 이유로 바그너가 죽자 리스트는 실의에 빠진다. 65세 때 바그너 탄생 75주년을 축하하는 음악제가 유럽 각지에서 열렸는데, 리스트는 런던과 파리를 거쳐 바이로이트로 향하다가 폐렴에 걸려 7월 31일 바이로이트에서 눈을 감았다.



3만 권의 역사 지리서가 소장된 상트 플로리안 성당 부속 도서관.




현재의 리스트박물관은 리스트가 학생들을 가르치던 음악학원이었다고 한다. 2층 건물에 들자 1972년에 제작한 피아노가 먼저 보인다. 벽에는 ‘도레(DORE) 1866’이라는 그림이 걸려 있다. 당시 화가인 도레가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에서 영감을 얻어 지옥의 단테를 그려 리스트에게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리스트가 단테의 ‘신곡’ 뿐만 아니라,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파우스트 교향곡’을 작곡했다고 하는바 문학작품도 깊이 애독했던 것 같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사용했던 아주 작은 일명 ‘하모니카 피아노’도 한쪽 방에 전시돼 있다. 전시실 바로 옆 소강당 문에 음악회를 연다는 안내문이 눈길을 끈다.

두 번째 찾아간 곳은 요제프 아틸라문학관. 헝가리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요제프 아틸라(1905~1937). 돼지치기 소년에서 유리제조공이 된 노동자 시인. 유네스코가 2005년에 ‘요제프 아틸라의 해’로 정했을 만큼 세계가 추모했던 시인. 우리나라에도 시집 ‘일곱 번째 사람’이 발간돼 있는바, 나는 그의 시 ‘유리제조공’을 잊지 못하고 있다.

“불을 일으키고/ 도가니 속에/ 투명한 용액을 끓여/ 피와 땀을 섞어 넣는/ 유리제조공./ 남은 힘으로/ 용액을 붓고는/ 매끈한 판유리를 만든다. 해가 뜨면/ 도시로,/ 작디작은 시골 마을 오두막으로/ 빛을 가져간다. 노동자로 불리기도 하고/ 시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들/ 노동자나 시인이나 매일반이긴 하지만./ 조금씩 피를 써 버리다/ 투명해진다. 그리고/ 미래로 향하는 큼지막한 크리스털 유리창이/우리에게 끼워진다.”



3만 권의 역사 지리서가 소장된 상트 플로리안 성당 부속 도서관.




아틸라의 아버지는 세 살 때 아메리카로 떠나버려 어린 아틸라는 양부모에게 입양됐고, 세탁 노동자였던 어머니는 암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했다니 불행한 가족사다. 조숙한 아틸라는 아홉 살 때 자살을 시도했다 하고. 일일노동자, 신문팔이, 신문 배달원, 항만 하역노동자, 선박 선원보조원, 옥수수농장 경비원, 시인, 번역가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아틸라는 결국 화물기차에 몸을 던져 32세에 생을 반납해버린다. 1937년 한 회사에 입사할 때 쓴 자기소개서를 보면 시의 씨앗이 그때 발아되고 있음이 엿보인다.

“3학년 독본에서 훈족 왕 ‘아틸라’ 이야기를 읽고 독서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이 아틸라여서 더 흥미로웠다. 기독교인 이름에는 아틸라라는 이름이 없다고 들었으므로 아틸라 왕 이야기가 놀라웠다. 나는 이때부터 나라는 존재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물어 겨우 찾은 아틸라문학관. 초인종을 누른 뒤 용건을 말하니 문을 열어준다. 젊은 학예사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자 웃으면서 명함 두 장을 내민다. ‘주헝가리 한국문화원 김재환 원장’과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의 명함이다. 3년 전에 개관했는데 내가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 방문자라며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1층 문학관에는 분노에 찬 아틸라의 사진과 자필편지, 그 밖의 소품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학예사가 아틸라 동상은 도나우 강변에 있다고 알려준다. 우리는 승용차로 강변도로를 두어 번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겨우 아틸라 동상을 발견한다. 아틸라는 구부정하게 앉아서 푸른 도나우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양복저고리를 벗고 한 손에 모자를 들고 있는데 희망을 잃어버린 듯 멍한 표정이다. 어쩌면 도나우 강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시를 구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도나우 강 건너편에 있는 ‘어부의 요새’가 보인다. 부다페스트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관광지란다. 휘황한 불빛의 야경을 볼 수 있는 명소라지만 시대의 질곡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반납했던 아틸라의 비극 때문인지 쉽게 발길이 돌려진다. 더욱이 오늘 나와 아내는 크렘스까지 가야 한다. 크렘스에서 1박하고 상트 플로리안 성당으로 가 빈 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기로 예약했기 때문이다.



32살로 생을 마감한 헝가리 노동자 시인 요제프 아틸라 캐리커쳐.




크렘스 베흐너 박사댁에서 1박한 우리는 상트 플로리안으로 향한다. 승용차 운전은 친절한 베흐너 박사가 해준다. 아내는 안톤 브루크너 연주에 흥미가 있지만 나의 관심은 다르다. 1717년에 개관한 성당 도서관을 보고 싶다. 우리는 성당 해설사를 따라서 성당 도서관부터 들른다. 성당의 15만 권의 장서 중에 역사 지리서 3만 권이 소장된 도서관이란다. 무게가 40kg인 책은 키도 커서 1m쯤 된단다. 819년에 발간한 최고서(最古書)도 있고. 1층, 2층의 서가는 모두 붉은 빛이 도는 호두나무인데 수리할 때 단 한 마리의 벌레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을 본 것 같다. 이윽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본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770년에 제작한 ‘안톤 브루크너 파이프 오르간’이다. 7300개의 파이프로 만든 오르간인데 큰 것은 1개가 300kg 이상으로 저음이 나오고, 작은 것은 1cm도 안 되는 고음용이란다. 안톤 브루크너가 죽으면 저 파이프 오르간 밑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데 지하로 내려가 보니 과연 안톤 브루크너의 대리석관이 안치돼 있다. 옆에는 성당 신자들의 해골이 켜켜이 쌓여 있고.

연주시작 전에 지정석으로 찾아가 앉는다. 지휘자는 빈에서 보았던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벌써 만석이다. 드디어 연주를 시작한다. 아내가 “안톤 브루크너가 성당 안을 휘젓고 다니는 것 같아요. 그의 음들이 살아서 춤추는 것 같아요”라고 중얼거린다. 연주가 끝나자 아내가 감동해서 울고 있다. 아내 앞에 앉은 한 노인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있다. 음악의 힘이다. <끝>

/글·사진 정찬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