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1000년 인물열전<35> 순천 민족독립운동지사 벽소(碧笑) 이영민<하>
벽소, 판소리 부흥으로 일제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섰다
출옥 후 감시에 사회활동 제약…문화예술활동 주력
1920년부터 명창들 순천으로 초청 소리판 벌이고
송만갑 명창 등 54명 사진 찍고 감상평 한시로 남겨
원각사 강제해산 30년만에 조선성악연구회 결성 기여
출옥 후 감시에 사회활동 제약…문화예술활동 주력
1920년부터 명창들 순천으로 초청 소리판 벌이고
송만갑 명창 등 54명 사진 찍고 감상평 한시로 남겨
원각사 강제해산 30년만에 조선성악연구회 결성 기여
![]() 판소리 선각자인 벽소 이영민은 1920년부터 28년간 당대 명창과 명인 54명의 사진과 함께 감상평(觀劇詩)을 남겼다. 송만갑(구례). |
문화재청은 지난 8월 일제강점기때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독립 운동가들의 수형카드(일제 주요 감시대상 인물카드)를 등록문화재 730호로 지정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DB(db.history.go.kr)에서 ‘이영민’을 검색해보면 삭발한 머리에 수형복 차림을 하고 있지만 눈빛만은 살아있는 40대 중반 나이의 벽소를 만날 수 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조선문화 말살 정책을 펴는 일제에 맞서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한 판소리 명맥잇기 등 문화운동에 힘을 쏟는다.
순천은 국악의 고장이다.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르는 지리적 위치 뿐만 아니라 오끗준, 김질엽, 박봉술, 박초월 명창과 오태석 거문고 명인을 배출하는 등 전통문화의 뿌리가 깊은 곳이었다. 또한 1930~1940년대 당대의 이름난 소리꾼들이 순천에서 판소리 무대를 활발하게 펼쳤다. 그 중심에는 판소리 선각자이자 판소리 애호가인 벽소 이영민과 후원자인 우석 김종익(순천대 설립자)이 자리하고 있다.
서종문 경북대 명예교수(국문학)는 ‘한국판소리 발전에 순천이 끼친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감상층에서는 순천 지역이 판소리 문화에 끼친 영향의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후원자 두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면서 벽소 이영민과 우석 김종익을 꼽았다.
일제는 조선문화 말살정책으로 1905년 국악단체인 원각사를 해산시키고 국악 활동을 억압했다. 이후 국악인들은 30여년간 조직체없이 떠돌다 1935년에 어렵사리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하고 후진양성과 창극(唱劇) 운동을 전개한다. 조선성악연구회와 벽소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나주 출신 인간문화재 정광수(1909~2003)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 판소리를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 등록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던 이태호 (사)유네스코 순천협회 대표에게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정광수 명창은 1932~1935년 순천 권번에서 소리선생을 지냈다.
1935년 어느 날, 서울에서 송만갑, 이동백, 한성준, 정광수 명창 등 많은 국악인들이 순천 벽소 선생을 찾았다고 한다. 우석 김종익 선생도 같이 왔다. 이야기 도중 ‘왜 이렇게 국악인들이 많이 (모여)있느냐?’면서 얘기가 시작됐다.
“일제의 식민통치로 대중 집회를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우리문화 말살정책의 희생물이 되어 이렇게 하는 일을 잃고 순천으로 모여들어 소일들을 하고 있다.”(이영민)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국악인을 활용한 민족운동이냐?”(김종익)
“서울에다 국악원 사무실을 마련하여 흩어져 있는 국악인들을 결집시켜 창극단을 조직케 하고 전국 순회공연을 하게 하면 우리 민족정기의 살아 움직임을 국민에게 보이는 것이 시급하다.”(이영민)
이에 우석 김종익은 거금인 1만원을 즉석에서 쾌척한다. 그날로 송만갑과 이동백, 한성준 명창이 서울로 올라가 종로구 익선동 157번지 대지(500평)와 건물(200평)을 구입했다. 그리고 “쇠퇴해 가는 조선 고래의 향토음악을 진흥 보급하기 위해” 조선성악 연구회를 결성한 후 판소리 다섯바탕과 ‘가극 춘향전’ 공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이보다 앞서 벽소와 우석 김종익은 1920년부터 당대의 명창들을 순천으로 초청해 소리판을 벌였다. 그리고 벽소는 명창들을 사진관으로 데려가 요즘으로 치면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사진 촬영은 1920년 송만갑(1865~1939) 명창을 시작으로 1948년 거문고 명인 오학남(1900~1964)까지 28년간 계속됐다. 이렇게 해서 명창 38명과 기악연주자·고수 16명 등 모두 54명이 국악사(史)에 소중한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특히 벽소는 명창들의 소리를 듣고 즉석에서 자신의 감상평을 한시로 표현해 사진마다 포함했다. 국악인들은 이 사진을 소중히 간직했다. 벽소는 나중에 이를 정리해 ‘관극(觀劇)· 시(詩)·사’(寫)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사진을 촬영한 곳은 ‘비나스 사진관’(현 영진약국 자리)였고, 촬영자는 사진관 조수인 김홍석 이었다.(순천시사)
“악부가 생긴 동방의 오백 년만에(樂府東邦五百年)/ 봉성에서 처음으로 한 노래신선이 났다(鳳城初出一歌仙)/쇳소리가 갑자기 화용도에 이르니(鐵聲忽到華容道)/ 만길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진다(萬丈銀河落九天)”(1920년 송만갑 명창 감상평)
“옥소리 쇳소리 웅장하고 맑으니(玉響金聲壯且淸)/ 자리에 오른 곳마다 온고을 몰려온다(登筵無處不傾城)/ 악단이 곧 절과도 같아(樂壇輒似蓮花界)/ 만학천봉에 경쇠(옥으로 만든 악기)하나 울려 퍼진다(萬壑千峰一磬鳴).”(1921년 임방울 명창 감상평)
또한 벽소는 가사(歌辭) 형식으로 ‘순천가(歌)’를 지었다. 1925년(43살) 무렵에 가사 일부를 쓰기 시작해 1947년(65살)에 최종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꼬박 20여년 세월을 가다듬은 셈이다. 송만갑 수제자인 박봉래 명창의 외동딸인 박정례(예명 박향산·1924~2005)가 곡을 붙이고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박봉술 명창은 박정례의 작은 아버지이다. 박정례 명창의 딸 송화자 역시 김죽파 등 스승에게 가야금을 사사하며 국악 명문가의 맥을 이었다.) ‘순천가’는 명창들이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하기에 앞서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허두가(虛頭歌), 일종의 단가였다. 중머리로 시작해 진양조를 거쳐 중중머리로 끝나는 곡조로 구성돼 있다. 순천 산천과 명소 40여곳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순신·정운·송희립 장군을 거론하며 일제에 대한 항거의식을 표출했다. 벽소는 지역에 대한 당당함과 자부심으로 ‘순천가’ 끝을 맺는다. “과연 순천은 동방일대(東邦一大)의 명승지됨을 알겠더라.”
정홍준 순천시의회 문화경제위원회 부위원장(전 순천국악협회 회장)은 “벽소 선생은 국악인을 후원해 국악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라고 말했다. 장여동 순천시 문화 전문위원 역시 “(벽소 선생은) 근대기 순천문화를 이끌었던 큰 축이었고, ‘순천가’를 짓고 국악인을 지원하며 국악전승의 기점(起點)을 만든 분”이라고 강조했다.
벽소가 이렇게 판소리 명맥을 잇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오랜시간 ‘순천가’ 창작에 역량을 쏟은 까닭은 왜일까?
김용찬 순천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벽소 이영민과 순천가’(2011년)라는 논문에서 “이영민은 출옥 이후 일제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사회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자, 이후 문화예술 활동에 주력한 것이라 여겨진다”면서 “일제강점기 하에 민중들의 현실은 당장 먹고사는 일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기에, 판소리 등 우리 음악에 대한 이영민의 적지 않은 관심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다”고 평가한다.
순천시는 지난 2014년에 순천 판소리 역할과 위상정립을 위해 전남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학술연구 용역을 실시한 바 있다. 연구자들은 순천의 판소리 문화자원을 조사 정리해 브랜드화하고 관광상품화해 미래가치를 창조할 것을 제언했다.
일제강점기 벽소의 활동상은 이데올로기의 색안경을 벗고 온전히 재평가해야 한다. 1920년대 순천에서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은 민족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이 결합돼 있었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지도자인 박병두(조선일보 지국장)와 이창수(시대일보 지국장), 이영민(동아일보 지국장)은 모두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사건(조선 공산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 가운데 박병두(1883~1936) 선생만 지난 2005년에 독립운동가(건국포장 추서)로 인정받았다.
이태호 (사)유네스코 순천협회 대표는 “지난 2008년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는데 ‘활동이후 행적 불분명’을 이유로 두 차례나 반려했다. 행정에서 알아서 국가유공자로 지정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고향에서 (벽소를) 민족운동을 했던 활동가로 받들어 모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가유공자로 당연히 지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송기동 기자song@kwangju.co.kr
/순천=김은종 기자 ejkim@kwangju.co.kr
서종문 경북대 명예교수(국문학)는 ‘한국판소리 발전에 순천이 끼친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감상층에서는 순천 지역이 판소리 문화에 끼친 영향의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후원자 두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면서 벽소 이영민과 우석 김종익을 꼽았다.
나주 출신 인간문화재 정광수(1909~2003)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 판소리를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 등록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던 이태호 (사)유네스코 순천협회 대표에게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정광수 명창은 1932~1935년 순천 권번에서 소리선생을 지냈다.
1935년 어느 날, 서울에서 송만갑, 이동백, 한성준, 정광수 명창 등 많은 국악인들이 순천 벽소 선생을 찾았다고 한다. 우석 김종익 선생도 같이 왔다. 이야기 도중 ‘왜 이렇게 국악인들이 많이 (모여)있느냐?’면서 얘기가 시작됐다.
“일제의 식민통치로 대중 집회를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우리문화 말살정책의 희생물이 되어 이렇게 하는 일을 잃고 순천으로 모여들어 소일들을 하고 있다.”(이영민)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국악인을 활용한 민족운동이냐?”(김종익)
“서울에다 국악원 사무실을 마련하여 흩어져 있는 국악인들을 결집시켜 창극단을 조직케 하고 전국 순회공연을 하게 하면 우리 민족정기의 살아 움직임을 국민에게 보이는 것이 시급하다.”(이영민)
이에 우석 김종익은 거금인 1만원을 즉석에서 쾌척한다. 그날로 송만갑과 이동백, 한성준 명창이 서울로 올라가 종로구 익선동 157번지 대지(500평)와 건물(200평)을 구입했다. 그리고 “쇠퇴해 가는 조선 고래의 향토음악을 진흥 보급하기 위해” 조선성악 연구회를 결성한 후 판소리 다섯바탕과 ‘가극 춘향전’ 공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이보다 앞서 벽소와 우석 김종익은 1920년부터 당대의 명창들을 순천으로 초청해 소리판을 벌였다. 그리고 벽소는 명창들을 사진관으로 데려가 요즘으로 치면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사진 촬영은 1920년 송만갑(1865~1939) 명창을 시작으로 1948년 거문고 명인 오학남(1900~1964)까지 28년간 계속됐다. 이렇게 해서 명창 38명과 기악연주자·고수 16명 등 모두 54명이 국악사(史)에 소중한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특히 벽소는 명창들의 소리를 듣고 즉석에서 자신의 감상평을 한시로 표현해 사진마다 포함했다. 국악인들은 이 사진을 소중히 간직했다. 벽소는 나중에 이를 정리해 ‘관극(觀劇)· 시(詩)·사’(寫)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사진을 촬영한 곳은 ‘비나스 사진관’(현 영진약국 자리)였고, 촬영자는 사진관 조수인 김홍석 이었다.(순천시사)
“악부가 생긴 동방의 오백 년만에(樂府東邦五百年)/ 봉성에서 처음으로 한 노래신선이 났다(鳳城初出一歌仙)/쇳소리가 갑자기 화용도에 이르니(鐵聲忽到華容道)/ 만길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진다(萬丈銀河落九天)”(1920년 송만갑 명창 감상평)
“옥소리 쇳소리 웅장하고 맑으니(玉響金聲壯且淸)/ 자리에 오른 곳마다 온고을 몰려온다(登筵無處不傾城)/ 악단이 곧 절과도 같아(樂壇輒似蓮花界)/ 만학천봉에 경쇠(옥으로 만든 악기)하나 울려 퍼진다(萬壑千峰一磬鳴).”(1921년 임방울 명창 감상평)
또한 벽소는 가사(歌辭) 형식으로 ‘순천가(歌)’를 지었다. 1925년(43살) 무렵에 가사 일부를 쓰기 시작해 1947년(65살)에 최종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꼬박 20여년 세월을 가다듬은 셈이다. 송만갑 수제자인 박봉래 명창의 외동딸인 박정례(예명 박향산·1924~2005)가 곡을 붙이고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박봉술 명창은 박정례의 작은 아버지이다. 박정례 명창의 딸 송화자 역시 김죽파 등 스승에게 가야금을 사사하며 국악 명문가의 맥을 이었다.) ‘순천가’는 명창들이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하기에 앞서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허두가(虛頭歌), 일종의 단가였다. 중머리로 시작해 진양조를 거쳐 중중머리로 끝나는 곡조로 구성돼 있다. 순천 산천과 명소 40여곳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순신·정운·송희립 장군을 거론하며 일제에 대한 항거의식을 표출했다. 벽소는 지역에 대한 당당함과 자부심으로 ‘순천가’ 끝을 맺는다. “과연 순천은 동방일대(東邦一大)의 명승지됨을 알겠더라.”
정홍준 순천시의회 문화경제위원회 부위원장(전 순천국악협회 회장)은 “벽소 선생은 국악인을 후원해 국악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라고 말했다. 장여동 순천시 문화 전문위원 역시 “(벽소 선생은) 근대기 순천문화를 이끌었던 큰 축이었고, ‘순천가’를 짓고 국악인을 지원하며 국악전승의 기점(起點)을 만든 분”이라고 강조했다.
벽소가 이렇게 판소리 명맥을 잇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오랜시간 ‘순천가’ 창작에 역량을 쏟은 까닭은 왜일까?
김용찬 순천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벽소 이영민과 순천가’(2011년)라는 논문에서 “이영민은 출옥 이후 일제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사회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자, 이후 문화예술 활동에 주력한 것이라 여겨진다”면서 “일제강점기 하에 민중들의 현실은 당장 먹고사는 일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기에, 판소리 등 우리 음악에 대한 이영민의 적지 않은 관심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다”고 평가한다.
순천시는 지난 2014년에 순천 판소리 역할과 위상정립을 위해 전남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학술연구 용역을 실시한 바 있다. 연구자들은 순천의 판소리 문화자원을 조사 정리해 브랜드화하고 관광상품화해 미래가치를 창조할 것을 제언했다.
일제강점기 벽소의 활동상은 이데올로기의 색안경을 벗고 온전히 재평가해야 한다. 1920년대 순천에서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은 민족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이 결합돼 있었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지도자인 박병두(조선일보 지국장)와 이창수(시대일보 지국장), 이영민(동아일보 지국장)은 모두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사건(조선 공산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 가운데 박병두(1883~1936) 선생만 지난 2005년에 독립운동가(건국포장 추서)로 인정받았다.
이태호 (사)유네스코 순천협회 대표는 “지난 2008년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는데 ‘활동이후 행적 불분명’을 이유로 두 차례나 반려했다. 행정에서 알아서 국가유공자로 지정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고향에서 (벽소를) 민족운동을 했던 활동가로 받들어 모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가유공자로 당연히 지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송기동 기자song@kwangju.co.kr
/순천=김은종 기자 ej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