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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시간속을 걷다]<8>1969년 나주 평화이발관
사각사각 … 아흔살 가위손에 마음까지 평화롭네
2017년 04월 27일(목) 00:00
1969년 개업해 현재까지 제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파랑·하양·빨강, 이발관 삼색 등이 빙빙 돈다. 안에 들어서면 하얀 가운을 입은 아흔 살 이발사가 왼손에 빗, 오른손에 가위를 들고 솜씨 좋게 머리를 깎고 있다. 사각사각…. 목에 감아 몸통을 가린 하얀 천에 머리카락이 쌓일수록 단정한 머리모양이 갖춰진다. 4월 어느 날, 나주 영산포에 자리한 ‘평화이발관’의 풍경이다. 이발관 주인장 손옥현 씨는 1928년 생으로 올해 만 89세이다. 이발에 입문한 때부터는 72년, 이용면허를 딴 때부터는 꼬박 63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오며 수많은 이들의 머리를 손질해온 ‘가위 손’ 인생이다.



◇왕복 20리길 걸어다니며 이발 배워=“10여 년 전부터 ‘바리깡’(머리를 깎는 기구)은 안 쓰고 있습니다. 대신 ‘전기 이발기’로 교체했고, 가위도 쇠가 좋아 거의 안 갈고 씁니다.”

이발관 내부공간은 의자 2개와 한쪽 벽면을 장식한 대형 거울, 세면대, 세탁기, 생수대 등으로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커다란 거울 좌우는 물론 구석진 곳에는 철쭉, 관엽식물 등 작은 화분들이 놓여 공간에 생기를 더해준다. 이발관은 남자의 스타일이 완성되는 공간이다. 빡빡머리와 상고머리, ‘하이 칼라’ 등 나이와 성격에 따라 머리 모양도 다양하다.

9남매 중 여덟째인 손씨는 16살이던 1944년에 처음 이발을 배우게 됐다. 농사를 짓던 형님이 ‘(이발을) 한번 배워보면 어떻겠느냐?’라고 권유했다. 그는 고향인 고흥군 남양면 장담리에서 과역면 면소재지까지 왕복 20리 거리를 걸어다니며 기술을 익혔다. 이듬해에 해방을 맞은 후 학업에 대한 욕심이 생겨 고흥중에 진학했다. 중학교를 마치고는 여수와 순천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이발을 배우게 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에 입대했다. 수도사단 기갑연대에서 복무하던 중 강원도 철원 금화지구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적이 쏜 포탄이 터지며 오른쪽 발등에 파편이 박힌 것이다. 파편이 ‘속에 딱 들어앉아 버려’ 제거수술을 하지 못한 채 현재도 오른 발에 그대로 남아있다. 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이발관 입구에 부착된 ‘국가유공자의 집’ 명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제대하고 나니까 할 것이 없습디다. 이발이 배워놓은 것이라 얼른 써먹기는 좋았지.”

그는 군 제대 후 여수에서 월급을 받는 조수로 일하며 27살(1955년)에 이용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이후 큰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으나 여의치 않아 1967년 사촌형님이 있던 나주 영산포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세 번째 옮긴 자리가 현재의 이발소다. 1969년 6월에 일제강점기부터 운영을 해온 기존 이발소를 인수해 문을 열었다. 앞에 쓰던 ‘평화이발관’ 상호가 좋아 그대로 사용했다. 서울에서 일한 이력 덕분에 손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48년째 이사를 하지않고 한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인수 전에 30∼40년간 이발관으로 운영된 것을 감안하면 얼추 한 세기 가깝게 이발관으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발사는 개화기에 탄생한 새로운 직업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을 거쳐 유입되다 보니 일본식 용어가 많이 사용됐다. 이발관에서 머리를 감기고 기술을 배우는 견습생은 ‘미나라이’(見習),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조수는 ‘한빠’(半端)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유소년기를 보낸 그는 일본어에 능통해 가끔 손님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깔끔한 얼굴로 손님 맞는 게 철칙=“1970년대 장발이 유행할 때 손님이 없어 이발관을 폐쇄하려고 생각할 정도였지. 지금은 ‘올드 맨’ 들도 미용실로 가. 요즘 문을 닫은 거나 마찬가지야.”

개업할 당시 ‘조발’(調髮=머리털을 깎아 다듬음) 비용이 300원이었던 것이 현재는 1만 원으로 올랐다. 1970∼1980년대 장발 문화와 더불어 1990년대 이후 남자들도 이발관 대신 미용실을 찾아가는 바람에 이발관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이다. 의자도 3개이던 것을 하나 줄였다. 한창때는 종업원을 2명 두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내 유복지(76) 씨와 단둘만 일한다. 할아버지가 머리를 깎으면 할머니가 면도를 하는 분업 체계이다. 부부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아들은 서울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노장 이발사는 손님을 맞기 전에 매일같이 손수 면도를 한다.

“깔끔한 얼굴로 손님을 맞으려고 합니다. 내 얼굴을 다듬는 것은 상식이에요. 내 얼굴이 깨끗해야 손님도 깨끗이 하는 거지 내가 털털해가지고 손님을 맞는 것은 잘못된 거에요.”

이발관은 영산포 이창동 삼거리에서 좌회전한 후 봉황면으로 가는 가마태길로 접어들어 70여m 진행하면 찾을 수 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발소 삼색 등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이발소 바깥에는 40여 개의 화분에 다양한 화초들이 심어져 있다.

도로명 ‘가마태’는 무슨 뜻일까? 주민들은 신부가 ‘가마’를 타고 가다 출산해 ‘태’를 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주시지(誌)에 따르면 “영산강변에 벼랑을 이룬 노봉산 남쪽에 위치하므로 산마을이란 의미로 ‘감(山)의 터’가 변하여 감아터, 가마터, 가마태로 불렸고, 산이 밭으로 변한 경우 받말, 밧말, 밤말로 이어지다 한자로 옮기면서 밤율자가 반영되어 ‘율정’(栗丁)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한다.

첫눈에 그의 나이를 짐작하기란 어렵다. 지팡이나 돋보기를 사용하지 않고, 탈모 없이 머리숱도 많다. 머리염색은 손님을 위한 예의이다. 50대에 양쪽 눈 백내장 수술을 했지만 현재는 깨알 같은 잔글씨도 읽을 정도로 시력이 좋다. 밤 10시쯤 잠자리에 들고 새벽 5시께 일어난다. 부부는 손님이 없는 시간에 번갈아 가며 운동 삼아 ‘동네 한바퀴’를 한다. 굳이 건강비결을 들자면 ‘자기절제’이다. 60대에 술과 담배를 단호히 끊었다. ‘내 몸 갖고 내 맘대로 못하는 주제에 뭣을 해야’라는 생각에 자기절제를 엄격히 해왔다.

개인적인 아쉬움도 있다. 동네 또래 친구나 친하게 지냈던 단골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무지하게 아쉽고, 고독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건강 제일주의’를 강조한다.

“뭘 하고 싶다기보다는 건강이 제일이지요. 욕심 나는 것이 없어요. 건강을 제일로 해서 살고 싶어요.”

아흔 살 이발사는 오늘도 변함없이 이발관 문을 열고 가위와 빗을 잡는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손님을 위하는 마음만은 변함없다. 이발관 삼색 등도 힘차게 빙빙 돌아간다.

/글·사진 =송기동기자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