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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시간속을 걷다 <38>1973년 충장로 노틀담 제화] 지고지순 수제화 사랑 代를 잇다
46년 구두 제작 외길 아버지
70∼80년대 최대 호황기
한달 천켤레 넘게 팔기도
촉감 좋고 견고한 가죽만 고집
제화공장·판매장 함께 운영
2016년 11월 30일(수) 00:00
1973년 광주 충장로에 문을 연 ‘노틀담 제화’ 임종찬(오른쪽) 대표와 대를 잇고 있는 아들 충호씨가 공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노틀담 제화는 구두 제작 공장과 판매 가게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오늘 취재는 슬리퍼를 신고 진행했다. 신고 간 부츠 가죽이 딱딱해 불편하던 차, 취재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슬리퍼를 건내주더니 부츠에 알루미늄으로 만든 발볼 늘리는 기계를 넣어 두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잠시 후 망치로 두드리며 가죽을 조금씩 펴주면 된다고 했다. 오늘 만난 이는 46년째 구두를 만들고 있는 노틀담 제화 임종찬(65) 대표다. 충장로 4가 입구에 자리한 가게는 수천켤레 구두로 가득했다. 그는 수제화, 그중에서도 가죽구두만을 고집하고 있다.

곡성 출신인 임대표가 노틀담 제화를 연 건 지난 1973년이다. 스물 둘 젊은 나이에 당시 최고 번화가인 충장로에 가게를 여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의 구두 인생은 1970년 시작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간 그는 친척이 서울 염천교에서 운영하는 ‘신진제화’에 들어가 수제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3년 후 충장로 4가 남양통닭 맞은편 건물에 첫 가게를 열었다. 상호는 당시 인기였던 안소니 퀸 주연의 ‘노틀담의 꼽추’에서 따왔다. 지고지순한 사랑이 마음에 남아서 였다.

두번째로 충장로 4가 입구(현 티파니 자리)에서 영업하다 가게를 키워 지금 자리로 옮겨온 게 13년전이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80년대까지는 호황이었다. 무엇보다 당시는 양장, 양복, 금은세공 등 충장로 상권 자체가 활황이었다. 주종목은 남성화. 많을 때는 한달이면 1000켤레 넘게 팔기도 했다. 충장로 가게 뿐 아니라 각 기업체가 운영하는 구판장에 신발을 납품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대형 마트가 일반화되기 전에는 구판장과 소비조합 등에서 생필품을 판매하곤 했고 기아자동차, 연초제조청, 금호타이어, 한라위니어 등 기업과 법원, 병무청 등이 주거래처였다.

초창기에는 구두 코 모양이 예쁜 구두가 많이 팔려나갔지만 점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3명의 직원들과 함께 손재주를 발휘할 수 있는 봉제 분야에 무게중심을 두고 구두를 제작하고 있다. 꾸준히 인기가 높은 신발은 옥스퍼드화다. 최근에는 부드러운 가죽을 사용한 운동화 스타일의 캐주얼화가 많이 나간다. 신사화는 평균 12만원선, 손이 좀 더 가는 여성화는 1∼2만원 더 비싸다.

지금은 기성품과 값싼 합성피혁 제품, 중국산 등이 밀려들면서 판매량이 줄기는 했지만 예전에 비해 맞춤 구두 판매 비율은 좀 더 늘어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절반은 가게에 다양한 디자인의 수제화가 수천점 진열돼 있어 편하게 자신의 치수에 맞는 제품을 사가는 경우다. 최근에는 직접 디자인을 가져와 제작을 의뢰하기도 한다. 맞춤 구두 제작에는 5∼7일 정도 소요된다.

“손님 취향에 맞춰 수제화를 만들다 보니 재고가 많이 늘어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겪어야할 일이기도 합니다. 기성화가 많이 들어오고 지금은 중국산도 예전에 비해 수준이 많이 높아졌어요. 가격 경쟁도 힘들고, 전망이 없다 보니 기술자 구하기가 힘듭니다. 젊은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함께 일하는 공장 직원들은 각 공정의 전문가들로 평생 함께 가실 분이죠. 30∼40년 일평생 구두를 만들어 오신 분들입니다.”

가게에서 30m 쯤 떨어진 공장으로 향했다. 건물 지하 1층에 위치한 80평 규모의 널따란 공간은 흥미로웠다. 눈에 띄는 건 수백까지 색깔의 다양한 가죽 원단이다. 재료 욕심이 많아 기회가 되면 수시로 구입해 둬 웬만한 재료상보다 종류가 더 많다고 했다. “손님이 원하면 언제든지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가죽은 매끈한 합성피혁에 비해 표면이 균일하지 못하고, 부위 마다 특성이 제각각이라 손이 많이 가고 다루기 어렵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합성피혁이 따라오지 못한다. 가격 경쟁력에서 떨어지지만 신발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가죽제품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구두 제작에 가장 중요한 게 신발의 기본 틀을 잡는 ‘골’이다. 발볼이 넓은 사람, 높은 사람 등 저마다 발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편안한 신발을 만들려면 그만큼의 ‘골’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골을 나무를 깎아 만들었지만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제작한다. 공장에는 얼추 3000여개의 골이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다. 양 사장은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골을 갖고 있을 거”라며 아주 오래전 유행의 신발도 손님이 원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공장에는 그밖에 바닥창 등을 일일이 다듬던 칼, 가죽 뒷축을 깎는 기구 등 수십년간 그와 함께 해온 각종 도구들도 즐비하다. 구두의 틀을 잡기 위해 ‘찜통’이라 부르는 기계에 신발을 넘는 모습도 신기하다.

요즘도 아침 8시면 공장에 나와 그가 주로 하는 작업은 구두 연마, 광택 등을 내는 마무리 공정이다. 손으로 일일이 구두약을 바르며 진행했던 작업은 지금은 기계를 이용해 좀 더 손쉽게 하고 있다.

임 대표 명함과 간판엔 ‘바이슨’(Bison) 이라는 상호가 하나 더 적혀 있다. 2005년 형님과 만들어 홈플러스 등에 납품하기도 한 브랜드로 3년여 전 유럽 구두 제조회사와 상호 문제로 법정까지 가면서 지켜낸 이름이다.

임 대표는 무엇보다 40년 넘게 한결같이 구두가게를 찾아오는 이들이 너무 고맙다고 말한다.

“개업하고 나서 지금까지 다니시는 분들이 많아요. 시외에서도 많이 주문들 하시죠. 저에게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평생을 저와 함께 해주시는 게 진짜 고맙죠. 더 좋은 신발로 보답드리는 길밖에 없습니다. 고객이 있는 한은 오랫동안 신발을 만들고 싶습니다. 요즌 상황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시작해 40년간 먹고 살고, 자식 키웠고 또 적게나마 이뤄놓은 게 있으니 행복하죠. 제품을 사고 안 사고는 고객이 스스로 판단하는 거니까 누구를 탓하거나 시대를 핑계대는 대신 잘 만드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리즈를 통해 만난 이들 대부분은 대를 잇지 못하는 점을 가장 아쉬워했다. 그런 점에서 임 대표는 행복한 경우다.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큰 아들 충호(38)씨가 10여년 광주로 내려와 가업을 잇고 있어서다.

“60까지만 하고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은 늘 했어요. 10년 전 아들이 와서 참 고마웠는데 지금 경기가 너무 않좋다 보니 미안한 마음도 있지요. 하지만 일반 직장도 다 고비가 있고, 그게 세상 사는 것 아닙니까.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요.”

임 대표는 구두 만드는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기계들과 부품 등을 오랫동안 보관하고 싶은 꿈이 있지만 여의치 않아 아쉽다고 했다. 또 가끔 구두 만드는 공정을 보고 싶다는 문의가 들어오면 마다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아버지와 인연을 맺었던 여든 넘으신 손님들이 여전히 우리집 구두를 찾으시는 걸 보면 참 고맙고 감사하죠. 아버지가 대단하시다는 생각도 들구요. 사양길이라는 건 알죠. 저도 이 일에 뛰어든 지 10년 정도지만 사람을 보면 습관적으로 다리부터 보게 되요. 저 사람이 신은 신발은 디자인을, 굽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면 더 좋겠다 머릿 속으로 막 그려보게 되는 거죠.”(임충호)

취재를 마치고 신발을 바꿔 신었다. 훨씬 부드러워 신고 벗기도 수월하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역시 신발은,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편해야 한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