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밝힌노래]<11>광주학생독립운동과 혁명가] 日帝 폭압 맞선 학생들 … ‘최순실 농단’에 다시 거리로
![]() 나주지역 학생들이 지난 5일 나주시청소년수련관 일대에서 학생독립운동 기념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나주=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
원한과 분노뿐인 조선 남아야
고국 산천 떠나서 이역만리에
고독과 벗을 삼아 누개성 상을
한난신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수림속 닭이 우니 고성의 종소리
밤은 가고 낮 온다고 천하에 울리네
더운 피 끓는 동지들 용진해가자
희망의 빛은 다가왔다 반도 강산에
(후렴)
반도야 슬퍼말고 잘도 잘 있거라
우리는 너의 회포 풀으리로다
“조선 학생 청년 대중이여! 궐기하라. 제국주의적 침략에 반항적 투쟁으로써 광주학생 사건을 지지하고 성원하자! 우리는 이제 과거의 약자가 아니다. 반항의 유혈이 있는 곳에 결정적 승리가 있는 것은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단결하고 궐기하라! 전투적 반항으로써 학살당하고 있는 광주 학생들을 지지하고 성원하자! 금후의 역사는 우리의 것이다.”〈1929년 12월11일 휘문고보 교실에 살포된 격문 중에서〉
나라가 힘들 때마다 청년학생들이 있었다. 87년전 오늘(1929년 11월3일)도 그랬다. 광주의 청년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차별과 억압에 대한 분노와 울분이었다. 일본 남학생들이 한국 여고생 3명을 희롱하는 사건으로 시작된 불꽃은 들불이 돼 전국으로 번졌다.
사건의 발단은 4일 전 기차역에서였다. 광주에서 출발해 나주역에 도착한 통학열차에 타고 있던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 3학년 박기옥·이금자·이광춘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모욕·조롱했다.
열차에서 내리던 박기옥의 사촌 남동생 박준채(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는 이를 목격하고 일본 학생들과 난투극을 벌인다. 주변에 있던 일본, 한국 학생들까지 가담하면서 50∼60명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이 출동했지만 오히려 문제는 커졌다. 일본 경찰은 한국인 학생들만 구타하는 등 편파적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일제의 탄압을 몸으로 체험하며 자라온 학생들은 이런 사건까지 겪게 되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다. 이미 학생들은 3·1운동을 계기로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들은 일제의 문화정책과 폭압 속에서도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항일의식과 조직력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 11월3일은 개천절(음력 10월3일)이자, 일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일(명치절)이 겹친 날이었다. 이날 행사에서 학생들은 일본국가 기미가요가 연주됐지만 침묵했고, 하굣길에 가두시위를 벌였다.
거리로 나선 학생들은 “신천지에 휘날리는 우리 동포야 / 길이길이 기다리던 오늘이 왔구나 / 무등산에서 단련한 기술로 / 용감히 적군을 물리치세”라는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재주좋은 학생이 서둘러 만든 행진가였다. 학생들이 충장로를 지날 때 시민들은 각목과 장작개비를 내줬다. 학생들은 중심가를 누비며 ‘조선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이날의 1차 시위는 일제의 차별적 식민지 교육, 그에 저항하기 위한 학생들의 비밀 결사, 통학열차에서의 충돌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만세운동으로 불꽃처럼 피어오른 것이었다. 신문의 보도는 당시의 시위가 3·1운동과 비슷했다고 평가했다.
경찰의 탄압은 불에 기름을 붓는 셈이었다. 경찰은 시위에 참여한 학생 70여명 중 60여명을 구속했다.
옥중에서도 투쟁은 계속됐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집단 또는 개인적으로 구호·단식 등의 방법으로 저항했다. 그리고 견디기 힘들때 학생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채찍질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원한과 분노뿐인 조선 남아야 / 고국 산천 떠나서 이역만리에 / 고독과 벗을 삼아 누개성 상을 / 한난신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 수림속 닭이 우니 고성의 종소리 / 밤은 가고 낮 온다고 천하에 울리네 / 더운 피 끓는 동지들 용진해가자 / 희망의 빛은 다가왔다 반도 강산에 //(후렴) 반도야 슬퍼말고 잘도 잘 있거라 / 우리는 너의 회포 풀으리로다” 당시 애국지사들이 부르던 노래였다.
학생들은 더 거세게 반발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들까지 가담해 같은 달 12일 오전 2차 시위를 벌였다. 일반 시민들도 공분했다. 특히 3·1운동 10년째를 맞아 학생 뿐 아니라 사회단체와 국민들도 참여했다. 이후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등이 참여하면서 학생들의 분노는 전국으로 퍼져갔다. 이들은 언론·집회의 자유와 식민지 교육 철폐,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주장했다.
독립운동은 그해 12월과 이듬해 1월까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10년 전 열린 3·1운동 이후 가장 오랫동안 대규모로 열린 항일 운동이었다. 학교는 190여개, 5만명이 넘는 학생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길은 해외에서도 활활 타올랐다.
해방 이후 학생들의 항일독립정신은 ‘민주주의 정신’으로 이어졌다.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시위 현장에도 늘 청년학생이 있었다. 특히 4·19를 정점으로 하는 1960년 반독재 투쟁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됐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 등에 분노한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은 망설임 없이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1972년 유신체제 수립 이후 전개된 ‘반유신운동’에도 학생들은 주체적으로 참여했다. 비록 제도적 탄압 속에서 좌절됐지만, 당시 학생운동은 유신체제 붕괴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0년 계엄령 철폐, 군사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5·18민주화운동에서도 학생들은 시민들과 함께 시위의 중심을 이끌었다. 1987년 6월항쟁 등 수 많은 사건 속에서 학생들은 불의에 저항했다.
그리고 2016년 11월 3일.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인한 국민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그 중심에 학생들이 있다. 국정농단 사태로 허물어진 민주주의를 되돌려달라는 외침이다. 대학마다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수능을 열흘 앞둔 수험생,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거리로 나오고 있다.
어른들의 부끄러운 잘못을 바로잡는 학생들의 움직임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학생들이 또 한 번 역사의 중심에 섰다.
/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고국 산천 떠나서 이역만리에
고독과 벗을 삼아 누개성 상을
한난신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수림속 닭이 우니 고성의 종소리
밤은 가고 낮 온다고 천하에 울리네
더운 피 끓는 동지들 용진해가자
희망의 빛은 다가왔다 반도 강산에
반도야 슬퍼말고 잘도 잘 있거라
우리는 너의 회포 풀으리로다
“조선 학생 청년 대중이여! 궐기하라. 제국주의적 침략에 반항적 투쟁으로써 광주학생 사건을 지지하고 성원하자! 우리는 이제 과거의 약자가 아니다. 반항의 유혈이 있는 곳에 결정적 승리가 있는 것은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단결하고 궐기하라! 전투적 반항으로써 학살당하고 있는 광주 학생들을 지지하고 성원하자! 금후의 역사는 우리의 것이다.”〈1929년 12월11일 휘문고보 교실에 살포된 격문 중에서〉
나라가 힘들 때마다 청년학생들이 있었다. 87년전 오늘(1929년 11월3일)도 그랬다. 광주의 청년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4일 전 기차역에서였다. 광주에서 출발해 나주역에 도착한 통학열차에 타고 있던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 3학년 박기옥·이금자·이광춘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모욕·조롱했다.
열차에서 내리던 박기옥의 사촌 남동생 박준채(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는 이를 목격하고 일본 학생들과 난투극을 벌인다. 주변에 있던 일본, 한국 학생들까지 가담하면서 50∼60명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이 출동했지만 오히려 문제는 커졌다. 일본 경찰은 한국인 학생들만 구타하는 등 편파적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일제의 탄압을 몸으로 체험하며 자라온 학생들은 이런 사건까지 겪게 되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다. 이미 학생들은 3·1운동을 계기로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들은 일제의 문화정책과 폭압 속에서도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항일의식과 조직력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 11월3일은 개천절(음력 10월3일)이자, 일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일(명치절)이 겹친 날이었다. 이날 행사에서 학생들은 일본국가 기미가요가 연주됐지만 침묵했고, 하굣길에 가두시위를 벌였다.
거리로 나선 학생들은 “신천지에 휘날리는 우리 동포야 / 길이길이 기다리던 오늘이 왔구나 / 무등산에서 단련한 기술로 / 용감히 적군을 물리치세”라는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재주좋은 학생이 서둘러 만든 행진가였다. 학생들이 충장로를 지날 때 시민들은 각목과 장작개비를 내줬다. 학생들은 중심가를 누비며 ‘조선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이날의 1차 시위는 일제의 차별적 식민지 교육, 그에 저항하기 위한 학생들의 비밀 결사, 통학열차에서의 충돌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만세운동으로 불꽃처럼 피어오른 것이었다. 신문의 보도는 당시의 시위가 3·1운동과 비슷했다고 평가했다.
경찰의 탄압은 불에 기름을 붓는 셈이었다. 경찰은 시위에 참여한 학생 70여명 중 60여명을 구속했다.
옥중에서도 투쟁은 계속됐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집단 또는 개인적으로 구호·단식 등의 방법으로 저항했다. 그리고 견디기 힘들때 학생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채찍질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원한과 분노뿐인 조선 남아야 / 고국 산천 떠나서 이역만리에 / 고독과 벗을 삼아 누개성 상을 / 한난신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 수림속 닭이 우니 고성의 종소리 / 밤은 가고 낮 온다고 천하에 울리네 / 더운 피 끓는 동지들 용진해가자 / 희망의 빛은 다가왔다 반도 강산에 //(후렴) 반도야 슬퍼말고 잘도 잘 있거라 / 우리는 너의 회포 풀으리로다” 당시 애국지사들이 부르던 노래였다.
학생들은 더 거세게 반발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들까지 가담해 같은 달 12일 오전 2차 시위를 벌였다. 일반 시민들도 공분했다. 특히 3·1운동 10년째를 맞아 학생 뿐 아니라 사회단체와 국민들도 참여했다. 이후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등이 참여하면서 학생들의 분노는 전국으로 퍼져갔다. 이들은 언론·집회의 자유와 식민지 교육 철폐,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주장했다.
독립운동은 그해 12월과 이듬해 1월까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10년 전 열린 3·1운동 이후 가장 오랫동안 대규모로 열린 항일 운동이었다. 학교는 190여개, 5만명이 넘는 학생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길은 해외에서도 활활 타올랐다.
해방 이후 학생들의 항일독립정신은 ‘민주주의 정신’으로 이어졌다.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시위 현장에도 늘 청년학생이 있었다. 특히 4·19를 정점으로 하는 1960년 반독재 투쟁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됐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 등에 분노한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은 망설임 없이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1972년 유신체제 수립 이후 전개된 ‘반유신운동’에도 학생들은 주체적으로 참여했다. 비록 제도적 탄압 속에서 좌절됐지만, 당시 학생운동은 유신체제 붕괴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0년 계엄령 철폐, 군사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5·18민주화운동에서도 학생들은 시민들과 함께 시위의 중심을 이끌었다. 1987년 6월항쟁 등 수 많은 사건 속에서 학생들은 불의에 저항했다.
그리고 2016년 11월 3일.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인한 국민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그 중심에 학생들이 있다. 국정농단 사태로 허물어진 민주주의를 되돌려달라는 외침이다. 대학마다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수능을 열흘 앞둔 수험생,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거리로 나오고 있다.
어른들의 부끄러운 잘못을 바로잡는 학생들의 움직임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학생들이 또 한 번 역사의 중심에 섰다.
/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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