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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김종숙씨] 점점이 재생되는 기억 … 영혼은 힘을 얻는다
교육열 높던 엄마, 큰집 수재들과 항상 비교
불안한 미래 싫어 간호보조원 양성소 선택
같이 독일 가자던 친구는 공항에 안나오고
깊은 향수병에 수면제 한주먹 털어 넣었는데…
그때 만난 독일남과 41년 … 그래도 잘 산것 같아
2016년 08월 25일(목) 00:00
파독 간호사 김종숙(만 66세)의 서재에는 장영희와 공지영과 알랑드 보통이 꽂혀 있었다. 나는 알랑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지하철에 깜박 놓고 내린 후 뭔지 모를 찝찝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종숙은 선뜻 그들을 나에게 건네며 미련 없이 웃음을 지었다. ‘후’하고, 입으로 책의 먼지를 털어내는 종숙에게서 문학소녀의 향취가 났다. 책벌레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서둘러 둘러댔다.



어머니는 고등교육을 졸업한 교육열이 뜨거운 분이었다. 종숙을 유치원에 보낼 정도였다. 종숙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광주에 살게 되었고, 종숙은 광주 중앙 유치원을 다닌 후 다시 아버지를 따라 고향인 목포로 내려와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마쳤다.

이후 어머니는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에 힘입어 종숙을 서울에 있는 외가집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종숙은 명문 이화여고를 졸업하게 된다.

“그때 외할머니가 너무 무서웠어요. 한창 먹을 때인데 밥도 많이 먹지 말라고 했어요. 외가집은 식모를 두고 살았는데 다른 집 잘 사는 애들은 도시락이 화려했지만 나는 항상 김치국물만 질질 흘리고 다녔죠.”

그 당시에 종숙이 다니던 학교에는 목포에서 올라온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집에는 따뜻한 밥이 있었고, 친구 엄마는 자애로웠다. 호랑이 굴 같은 외가집에 들어가기 싫어 늘 대문 앞에서 서성거렸던 그때가 떠올랐다. 종숙의 공부는 점점 뒤처졌다. 종숙의 어머니는 늘 큰집 자식들과 비교하곤 했다.

“큰 집 첫째언니는 나이 들어 숙대 부총장을 지냈고, 둘째 언니도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해 교수가 되었어요. 그때도 언니들은 수재였어요.”

큰집도 4명, 종숙의 집도 4명의 형제였다. 어머니는 큰 집 형제들은 공부를 잘해 모두 좋은 대학에 입학한 것을 몹시 부러워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대학 입시에 붙을 자신이 없었어요. 닥쳐보기 전에 발뺌하고 싶더라구.”

결국 종숙은 밀려올 미래가 싫어 그때 한창 붐이었던 간호보조원 양성소를 찾아갔다. 친구의 유혹도 한 몫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구와 함께 고향인 목포로 내려와 그곳 간호보조원 양성소를 다녔다.

“함께 가자던 친구는, 막상 비행장에 가보니 학사장교였던 남자친구가 말린다며 독일을 안 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만 독일에 오게 되었죠.”

사실 처음에 아버지도 딸이 독일 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단지 대학에 떨어져 재수한다고 생각만 했다. 결국 모든 사실이 드러나자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3년 일하는 동안 세상 공부 잘하고 돌아오너라’고 말했다.



1972년 독일에 온 첫 날, 독일 병원측에서는 100마르크를 주면서 살 것을 사라고 했다.

“냄비도 사고 쌀도 사고, 요구르트가 맛있다고 샀는데 시큼달달한 게 맛이 없었어요. 끓여먹나 싶어서 팔팔 끓여 커피와 설탕도 넣어서 먹구요. 하하. 지금은 입맛이 변했는지 그 요구르트가 그렇게 맛있어요.”

종숙은 6개월 동안 한국에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편지를 쓸 의욕도 없었다. 향수병으로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날마다 허기졌다. 독일 사람들은 아침에 빵을 하나만 먹었는데 종숙은 3-4개를 허겁지겁 먹고도 배고팠다. 아니, 정에 고팠다는 말이 맞겠다.

어느 날 종숙은 다량의 수면제를 입에 넣었다. 외롭고 힘들어서 자살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삶을 마감한다면 종숙은 이름 없는 동양여인으로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종숙은 그때 옆에서 자신을 돌보아준 독일인 환자와 가까워졌다. 그게 사랑인 줄도 몰랐다. 그저 따뜻하게 대해줘서 외로움에 만났고, 3년 후인 75년 결혼을 했다.

“처음엔 남자가 잘해주니까 그냥 만나주었는데 살다 보니 정이 든 것 같아요. 지금까지 남편과 41년을 살아왔으니 잘 살아온 것 같네요.”

막상 결혼한다고 하니 한국 식구들은 걱정이 많았다. 독일에 일가친척도 없는데 혹여 나쁜 사람에게 당한 것은 아닌지 염려했다.



1974년에 아버지가 보낸 편지에는 늘 걱정이 배어 있었다.

<아래 사진>

〈…… 서독 남자들이 한국 간호원들의 돈을 미끼로 유혹해서 거기에 넘어간 간호원들이 있다는 신문을 보고 걱정한 차에 너한테 서독남자와 교제한다는 편지를 받고 얼마나 낙심했는지 모른다. 종숙아! 네 앞 길을 네가 잘 지혜롭게 처세하기 바란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건강해서 건실한 매일을 보내기 바란다. 이제는 한국 돌아올 날이 1年 밖에 남지 안헸으니(않았으니) 착실이 지내다 건강한 모습들로 만나자 …… 1974년 11월 8일 고향에서〉



아버지는 늘 편지를 보냈다. 살아생전 받은 편지만도 500장이 넘는다. 아버지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그야말로 선비였다. 일본말을 잘해서 일본 농산물 관련 잡지를 매달 구독했고, 일본어 강사도 했다. 책을 좋아했지만 여러 사업에도 손을 댔다. 파인애플 농장도 하고 가축병원도 차렸지만 돈은 따라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주머니에 만 원 짜리 한 장만 있어도 만족할 수 있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종숙의 내면 성숙을 위해 여러 고전을 배편으로 보내주고,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 보내준 서신과 돈 25,0000원 잘 받았다. 별 일 없이 건강히 지낸다니 무엇보다 감사하다. 今年은 철이 늦어 김장 담근 사람이 없다. 2,000원 하던 고추가 8,000원까지 올라 고추 1근도 안 사놓기는 今年 처음 일이다. 淑! 네가 서독 간 후로는 여태껏 계속 물가가 오르기만 하니 어처구니 없구나. 보내준 돈은 큰 도움은 된다마는 에초에 계획헸던 네 몫으로 저축을 못 헤 무능한 父母가 되어 미안하기 그지 없다.…… 1978년 11월 24일 아버지.〉



“며칠 전 오랜 만에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편지를 읽으면서 정말 많이 울었네요. 가슴이 아파 동생에게도 전화하고 그러면서 또 실컷 울고. 내가 독일에 왜 왔는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종숙은 인터뷰 내내 지나간 세월을 더듬어갔다. 늘 걱정해주던 부모님 모두 노을 저편으로 사라졌다. 어릴 때는 공부 잘한 큰집 식구들이 부러웠지만, 종숙은 지금 평범하지만 우애가 좋은 자신의 형제들이 자랑스럽다. 기억을 불러올 때마다 종숙의 영혼은 힘을 얻었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문득 알랑드 보통의 말이 머릿속을 후비고 지나갔다.

<끝>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취재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