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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벌교 한도순씨] 아무도 찾지 않는 정신병동 … “내가 식구 돼 줄게”
천자문 대신 팝송 읊던 서당집 딸
배우 꿈 대신 택한 비상구 독일행
기술공 남편 만나 딸 둘 가정 꾸려
한국 와 시어머니 임종 지킨 효부
2016년 08월 11일(목) 00:00
고향 보성 벌교를 떠나 독일에서 간호사로 정착한 한도순씨가 동료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해질 무렵 석양은 왜 그리 고즈넉하게 저무는지, 땅거미는 왜 한 순간 지면을 덮고 어둠을 흩뿌리는지 어린 도순은 동그란 눈을 반짝거렸다. 삶의 뒷자락을 들추다 배시시 미소가 지어지는 시절이 있다면 그건 순수의 계절일 때다.

그녀, 유년의 기억은 발이 부르트도록 산나물을 캐러갔던 일이며, 사촌오빠가 언덕 위에 만들어준 그네를 뛰는 것에서 비롯된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땡땡이 치마를 펄럭이며 그네에 의지해 하늘 높이 올랐던 소녀 도순은 그때 이미 저 멀리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서당 선생님인 할아버지 방에서는 천자문 외우는 소리가 여름밤을 수놓았다. 뽀얗던 얼굴에 여드름이 생기던 순간부터 도순의 촉수는 천자문 보다 라디오에 집중되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성우들의 진지한 연속극에 도순의 눈은 물빛으로 반짝거렸고, 구슬픈 노랫소리에 어깨가 들썩거렸다. 도순은 흙먼지 날리는 시골이 아닌,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처럼 다른 곳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착각에 빠졌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도 4km는 족히 들어가야 할 시골마을에서 도순의 미모는 빼어났다. 맑고 선한 눈망울, 반듯한 입매, 여성스런 미소, 오똑한 콧날과 적당히 크고 날씬한 키는 어쩌면 시골 촌부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영화배우 남경림과 윤정희의 고아한 외모를 흠모하며 내면으로 배우의 꿈을 간직한 순진한 소녀, 한도순(만 67세).

교육열 강했던 부모님은 농사일을 해서 8남매의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오빠 4명이 도시에서 유학하던 터라 도순도 자연스럽게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방학이 되어 시골에 내려가면 농사일에 치여 있는 자신이 더더욱 싫었다. 그 당시 도순은 미국 팝송과 가요에 심취되어 있었다. 소녀의 욕망은 자꾸만 미지의 세계로 향했다. 도순은 점차 화려한 연기의 꿈을 접는 대신, 현실적인 삶의 비상구를 떠올리게 되었다. 흘끗 곁눈질하기에도 연기자의 길은 도순과는 거리가 먼 여정이었다.

그때 오빠가 파독 간호사 정보를 들려줬다. 간호보조원 양성소 1년만 다니면 구라파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월급도 많고 별천지라는 소문도 돌았다. 도순은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호기심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히틀러라는 인물과 2차 대전이 일어났던 곳이라는 등 너머의 정보도 신선했다. 당시 청춘들에겐 떠난다는 자체가 마냥 설레던 때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순의 꿈은 구라파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 1971년 22살의 나이에 독일 행 비행기를 탔다.

11월의 독일은 을씨년스러웠다. 대지를 감싸는 하얀 눈을 밟으며 병동으로 향하던 첫 날의 설렘을 잊을 수 없다. 처음 4개월은 병원에서 독일어 공부만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후 본격적으로 병동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몰려 왔다. 아침 근무 후 오후에 집에 와서 밥을 먹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처음 3년간은 내과에서 일했고, 이후에는 정신병동에서였다.

“환자들이 소리 지르고 폭력적이었어요. 의사 처방으로 몸을 묶어놓고, 약을 처방하면 겨우 수그러들었지만 제 몸으론 버거웠어요. 무서워서 밤 근무 때는 간호사실 문을 잠그고 들어가 있을 정도였어요.”

환자들의 행동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간호사들을 발로 차는 것은 물론이고, 복도를 걸어가다보면 뜬금없이 얼굴을 쳐서 안경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환자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익숙해졌고 나름대로 다루는 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그들에게 유일한 식구는 간호사들 뿐이에요. 그래서 그분들, 안 보면 궁금하고 안쓰러웠어요.”

정신병동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보통 밤 근무를 혼자 하는데 환자가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환자의 임종이 임박해지면 대부분 독방에 묵게 하는데 도순이 근무하던 날에 환자는 삶을 마감했다. 그가 눈을 감은 그날 저녁 너무 무서워 그 방을 지나가지 못했다. 옆의 병동 간호사를 불러 사후 처리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죽은 사람을 보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단순하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도순은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눈비와 상관 없이 매일 40분 정도 자전거를 타면 가슴 속이 후련해졌다. 독일에 와서 가장 먼저 구입한 물건이 자전거와 라디오였다. 겨울이면 눈 쌓인 숲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면 옆에 서 있던 토끼도 자전거와 함께 뛰었다. 그렇게 숲길을 달리다보면 유년의 기억이 떠올라 눈물이 나곤 했다. 가끔 몸서리치게 다가오는 향수병에 몸살을 앓기도 했다. 어머니 또한 도순이 독일로 떠난 후 밤마다 딸이 보고 싶어 우울증에 걸렸다.

“그때 오빠가 독일 가는 정보를 알려주었기에 어머니가 오빠에게 야단을 쳤대요. ‘너가 들쑤시지만 않았어도 도순이가 가지 않았을텐데’ 하고 말이죠.”

도순의 어머니는 해가 지면 딸 생각에 눈물을 지었다. 하지만 도순은 한 번도 부모님을 독일로 모시지 못했다. 그게 지금도 한이 될 정도다. 물론 결혼 전까지는 매달 생활비를 제외하고 모두 송금했다.

78년에 지멘스 기술공으로 독일에 온 남편과 결혼한 후, 두 딸을 낳고 줄곧 직장과 가정에 충실해 왔다. 장남이었던 남편을 생각해 도순은 결혼 후 매달 300유로 씩 한국에 있는 시댁에 송금했다. 대신 친정에는 한 푼도 챙기지 못했다. 친정은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시지만 시댁은 시어머니 한 분이라 그게 도리라 생각했다.

“2013년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보내드렸어요. 모시지도 못하고 옆에서 자식 노릇도 못해서 늘 송구스러웠죠.”

2011년 퇴직한 도순은 남편과 함께 시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4개월을 시어머니와 함께 하면서 모든 게 감사하고 행복했다. 한국에 사는 형제들은 다들 바빴고 누구 하나 시어머니를 간호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 아침과 밤을 남편과 교대로 함께 간호했다. 마지막으로 큰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했던 어머니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사랑 많은 며느리 한도순의 눈을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어머니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병동에서 일할 때 힘든 환자들을 보면서 견뎌냈는데, 시어머니와는 겨우 4개월이었어요. 아쉬웠어요.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독일로 온 것과 바로 시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킨 것이에요.”

독일어 말에 ‘Ende ist gut, Alles gut(엔데 이스트 굿, 알레스 굿)’이라는 말이 있다. 마지막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거라고.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를 타는 그녀의 지금은 십대 소녀의 계절 같다. 언어 하나하나에 정서가 있고 따스한 온도가 느껴지는 그녀, 한도순의 지금 계절은 참 ‘gut’(좋다는 의미의 독일어)이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