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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백년의 시간이 무너진다 수 십년 뒤엔 볼 수 없다니…
<6> 킹조지섬
2015년 07월 29일(수) 00:00
킹 조지섬 인근 마리안 소만 빙하에 가까이 갈수록 거대한 얼음 덩어리의 양감과 힘이 그대로 느껴진다.
남극 킹조지섬에는 여러 나라의 기지가 있다. 러시아 벨링스하우젠 기지, 중국 장성 기지, 칠레 프레이 기지, 칠레 에스쿠데로 기지, 우루과이 아르티가스 기지 등이 있다.

남극 킹조지섬 내 기지들은 서로 유대가 두텁다. 각국 기지는 남미를 통해 들어오는 물류의 보급을 돕기도 하고 환자가 생기면 자기 기지의 의료장비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각국 기지의 의사가 협진을 하며 환자가 완전히 나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칠레는 남극 킹조지섬과 가장 가까운 나라다. 칠레는 남극에 군사기지와 연구기지 등 총 4개의 기지를 운용하고 있다. 그 중 칠레 해군 기지(필데스 기지) 캡틴 이반(Ivan Navarrete Leon)과 군인들이 세종기지를 찾았다.

이들은 세종기지 27주년 창립기념일에도 세종기지를 방문했었고 평소에도 자주 왕래하는 사이이다. 다들 농담도 하고 안부도 물으며 사이좋게 점심을 먹었다. 점심시간 직전 갑작스런 방문이라 원래 한국사람들이 먹는 매운 반찬 그대로 식사했다. 여기저기서 “피칸테”(Picante·스페인어로 맵다는 뜻)소리가 들려왔다.

물과 맵지 않은 반찬을 권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칠레 해군 기지 헬리콥터로 마리안 소만 빙하 위를 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늘 바라보던 곳이었다. 흥분도 되고 긴장도 되었다.

헬리포트에 나갔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프로펠러가 돌아가고 있었다. 안전복을 입고 몸을 굽혀 헬기에 탑승했다. 안인영 대장님과 홍준석 고층대기연구원도 함께 탑승했다.

헤드폰을 썼다. 둥실 떠오른 헬리콥터는 곧장 마리안 소만 빙하를 향해 날아갔다. 평소 아득히 펼쳐진 빙하와 빙하의 단면, 빙벽을 바라보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빙하는 그 안에서 스며 나오는 것 같은 푸른빛을 띠고 있다. 그걸 멀리 기지에서 바라보면 막막하고 궁금한 알 수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빙하를 향해 날아가고 있으니 그리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택시를 탄 것 같았다.

마리안 소만의 빙하는 지난 1956년부터 2006년까지 2km 가량 후퇴했다. 극지연구소 이주한 박사님의 연구에 따르면 이 정도 속도라면 2060년에는 마리안 소만의 빙하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빙하 두께와 수온도 큰 결정 요소이지만 그것들은 급변하지 않기 때문에 대기온도가 빙하의 전진과 후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남극 킹조지 섬은 지구상에서 평균 대기 온도가 빠르게 상승하는 곳 중 하나이다.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에 따르면 27년 사이에 킹조지섬 대기온도는 1도 정도 상승했다.

해양조사를 나갈 때 조사정점 하나가 빙벽 가까이에 있어서 마리안 소만에 근접할 때가 있는데 각별히 조심한다. 빙벽이 무너져 내리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징조없이 와르르 무너진다. 빙하와 시간이 함께 찬 바닷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소리도 특이하지만 시각적으로 약간의 충격도 있다. 일종의 ‘분리’’인데, 그 모습은 그냥 아무 느낌없이 보기는 힘들다. 나의 경우에는 번번히 상실감이 들었다.

빙하에 가까이 갈수록 거대한 얼음덩어리의 양감과 힘이 느껴졌다. 헬리콥터는 스칠 듯 빙하 위를 낮게 날기 시작했다. 빙하의 주름이 생생하게 보였다. 깊은 주름은 보기에는 아름다워도 사실 끝을 알 수 없는 매우 위험한 곳이다. 이 크레바스에 2005년 이웃 아르헨티나 기지 대원들이 빠졌다. 당시 세종기지에서도 적극적으로 구조활동을 벌였지만 두 명의 대원이 안타깝게 명을 달리했다.

빙하가 얼었다 다시 녹는 과정에서 식물성 플랑크톤이 번성한다. 이 플랑크톤은 남극 생태계에 큰 기여를 한다. 세종기지를 찾아오는 코끼리 해표, 웨델해표, 젠투펭귄, 턱끈펭귄, 남극도둑갈매기 등 여러 생물은 마리안 소만 빙하의 아이들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면 마리안 소만으로부터 유빙이 떠내려와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을 때가 있다. 해변까지 올라와 있을 때도 있다. 사막에서 발견되는 바짝 마른 동물의 흰 뼈처럼 회색 해변에 흰 유빙이 잔뜩 몰려와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그 하얀 윤곽과 덩어리감은 뽑아 놓은 치아 같기도 하다. 엄청나게 긴 시간을 할부로 바라보는 기분이다.

저 얼음에는 몇 백년이 그대로 들어있다. 이런 식으로 ‘저기에는 시간이 포집되어 있다’는 사실도 감탄할 만한 것이지만 얼음 자체가 아름다워서 먼저 감탄한다.

창문을 열면 마리안 소만은 기지 기준 오른쪽에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유빙이 몰려오면 마치 각각 다른 크기의 흰 시간 덩어리들이 수직선을 역행하여 왼쪽으로 흐르는 기분이 든다. 그 안에 들어가 있고 싶다. 오리배 안에 들어가 있는 한달 된 연인들처럼 열심히 페달을 밟고 싶다.

〈전 남극 세종과학기지 28차 월동대 생물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