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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질 뻔한 이반족 직조기술 새로 태어나다
8부 말레이시아 편 3 툰즈가 박물관
2015년 01월 12일(월) 00:00
시야 할머니는 잊혀져가는 전통을 보전하기 위해 툰즈가 박물관에서 예전 방식으로 직조를 하고, 직물제작을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손자를 위해 옷 한 벌을 만드는데 3년쯤 걸려요. 옷을 만들어 선물해줘야 할 손자가 3명이니 모두 만들려면 10년쯤 걸리겠죠? 팔순을 넘어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끝까지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가진 기술을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그들이 이어 옷을 만든다면 언젠가는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오래 되고 귀한 것일수록 혼자만 간직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며 지켜나가는 것. 이반족이 전통을 계승해가는 방법입니다.”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 작은 도시 쿠칭에 있는 툰즈가(The Tun Jugah)박물관에서 만난 시야(82) 할머니는 직물을 짜는 섬세한 손놀림만큼이나 전통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소수민족인 이반족 출신으로 열 살 때부터 직물을 짜기 시작한 그녀는 당시 여인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와 어머니가 배우고 만드는 직물과 자연스레 친구가 됐다. 직물제작 경력만 70년이 넘지만 공장에서 생산되는 값싼 옷이 넘쳐나 보고 배운 기술을 접어야 하나 고민도 했다. 세월 흐름 속에 영원히 잊혀질 뻔한 이반족 전통 직조 생산방식이 다시 활력을 얻은 것은 그녀가 툰즈가 박물관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툰즈가 박물관은 이반족이 그들 고유 전통직물 생산과정을 고스란히 재현한 곳이다. 박물관에는 혼례나 장례식 때 입을 옷의 재료인 직물뿐만 아니라 이를 생산하는 베틀 등 모든 도구를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오래전부터 사용됐던 목걸이와 팔찌, 모자 등 소수민족이 사용하던 액세서리를 체계적으로 보전 중이다.

말레이시아 소수민족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민족이자 전통 계승에 있어 롤 모델이 되고 있는 이반족. 여기에는 툰즈가라는 개인의 노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반족 출신으로 말레이시아 정치에 입문해 소수민족을 위한 정책지원에 앞장서고 자신의 이름을 붙인 박물관을 세워 전통 보전에 힘쓴 툰즈가. 이러한 노력은 대를 이어 계승됐다. 그의 며느리 다틴 아마르 마가렛 링기(Datin Amar Margaret Linggi)씨는 전통방식대로 직조를 하던 이반족 여인이었다.

평범한 이반족 여성은 전통을 지켜가는 툰즈가를 만나며 본격적으로 박물관을 세우고 운영하는 데 힘을 보태게 됐다. 현재 소수민족 전통을 보여주는 정부 소유 박물관도 있지만 전통 직물 생산과 보전에 대해서만큼은 툰즈가 박물관이 단연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곳에서는 전통직조방식을 보존하기 위해 유물을 수집 보전하는 것을 넘어 새롭게 생산하고 계승할 기술을 가진 이들을 각지에서 초빙하고 있다. 보르네오섬 카핏 출신 이반족으로 이곳에서 15년째 근무하고 있는 시야 할머니 역시 박물관에서 일하게 되면서 전통직조 방식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중이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전통을 현재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툰즈가 박물관에는 이반족 여성은 물론 여러 지역에서 온 여성들이 전통 방식으로 직물 생산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 여성들이 기술을 익히는 중이다. 희망적인 것은 툰즈가 박물관에서 교육하는 직조 과정을 20대 젊은 말레이 여성들까지 배우고자 한다는 것이다. 전통 직조방식으로 만든 의복을 혼례식과 장례식 등에서 이용하기 위해 구매하는 수요가 있어 판매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직 풀지 못한 숙제도 있다.

툰즈가 박물관에서 직물생산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들은 많지만 그 속에 담긴 문양이 가진 의미, 유래 등을 아는 이들은 사실상 전무한 상태다. 할머니, 어머니에게 직물 만드는 기술만을 단순히 배웠거나 박물관 교육 프로그램에서 익혔을 뿐 직조과정 전반을 이해하고 있는 경우는 없었다. 직접 만든 직물을 판매하거나 가족에게 선물하기 위해 박물관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독수리, 악어, 사람, 뱀 등 자신이 새기는 모양이 전통 문양이라는 점은 알지만 특별한 유래, 의미 등을 전부 알지 못한다는 한계는 분명했다. 다만 고향도, 생활방식도 심지어 사용하는 언어까지 다른 경우도 있지만 전통에 관심을 갖고, 계승하려는 노력이 있다는 것은 희망적이었다.

툰즈가 박물관 큐레이터를 맡고 있는 자넷 라타 노엘(Janet Rate Noel·여)씨는 생활 속 친숙한 전통을 강조했다.

“툰즈가 박물관은 이반족 문화를 지키겠다는 개인 노력이 만든 곳이지만 재원과 인원 등 여러 가지가 열악합니다. 하지만 젊은 이반족 여성들이 찾아와 전통을 배워 생활을 꾸려나가고, 또 그걸 보기 위해 국내외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습니다. 전통 유산을 수집해 보관하는 수준을 넘어 전통을 새롭게 재창조해나가는 일. 그것이 툰즈가 박물관이 하는 역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