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누가 기억할까...아버지 한 못 풀어 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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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누가 기억할까...아버지 한 못 풀어 원통”
우키시마호 생존자 유족 박진주씨
“최소 7000명쯤 탔다고 말해”
사죄 못받고 2000년 눈 감아
2026년 03월 02일(월) 20:15
고(故) 박신우씨 아들 박진주씨.
2일 광주시 광산구 운남동에서 만난 우키시마호 사건 생존자 유족 박진주(77)씨는 “일본은 우키시마호 탑승 명부도 숨겨 가며 의혹만 산더미처럼 남기고, 우리 정부도 대응을 미루다 피해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도록 하나도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박씨의 아버지인 고(故) 박신우씨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영암군 삼호면(현 삼호읍) 중촌마을에서 태어나,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일본 아오모리현 군 시설부에 강제동원됐다.

당시 면 직원들과 순사(경찰)가 찾아와 각 가구당 1명씩 강제로 동원해 갔고, 그는 2년여 동안 군속(군무원)으로서 일본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핍박을 견디면서 근무했다고 한다.

박씨는 “일하는 곳에는 한국 사람이 많았는데 일본인들이 밥도 제대로 안 주고 허구한 날 ‘조센징’이라며 채찍질을 했다고 했다”며 “등에는 칼자국도 남아 평생 동안 극심한 후유증을 앓으셨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먼 타지에서 기다리던 광복을 맞았지만, 군인들이 찾아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 배에 타라”며 이들을 몰아세웠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많은 이가 귀국선에 올랐지만, 그 배는 끝내 ‘목적지’로 안내됐던 부산에 닿지 못했다.

박씨는 “배에 적어도 7000명쯤은 탄 것 같다고 하더라. 배 방향이 이상하다 싶더니 굉음과 함께 배가 안에서부터 찢어졌다고 했다”며 “뱃머리가 가라앉는 것을 보고 바다로 뛰어들어 죽을 힘을 다해 헤엄치는데,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의 팔다리와 송장이 손에 걸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더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박씨 아버지는 바닷가로 수일간 기름을 둘러쓴 사람들이 떠내려오던 모습이 까마귀떼 같았다고 묘사했다고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을 구하려고 뒤졌는데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다는 것. 집에 갈 방법이 없던 차에 만난 동향 사람이 허리띠에 숨겨두었던 돈을 꺼내 함께 고향으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박씨의 아버지는 “눈을 감으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팔다리가 내 몸을 감싸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박씨 아버지는 전국 곳곳을 돌며 우키시마호 피해자들을 찾아다니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도 진행했지만, 끝내 사죄를 받지 못한 채 2000년 눈을 감았다.

박씨는 “시간이 흐르고 생계에 바쁘다 보니 피해자들과도 연락도 끊겨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피해자 3세에 접어들다 보니 후손들도 피해 사실을 모를 것”이라며 “국민이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정부가 움직이고, 끝내 진상을 밝혀 오욕의 역사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글·사진=윤준명 기자 yoon@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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