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그림 한 점 - 박용수 동신여고 교사·화순문학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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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그림 한 점 - 박용수 동신여고 교사·화순문학 편집장
2026년 02월 02일(월) 00:20
박수근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이를 업던 아련한 추억이 앙상한 나목과 함께 떠오른다. 나목 너머로 을씨년스런 회색빛 배경도 오버랩 된다.

아이가 아이를 보던 시대, 유년의 기억과 그림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기 때문일 것이다. 홍역으로 아이를 자주 잃던 때였다. 하교해서 집에 오면 부모님은 일 나가시고 아무도 없었다. 나를 반기는 것은 감나무뿐이었다. 난 책가방을 던져놓고 허겁지겁 뒤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쪼르르 감나무에 올라서 우적우적 따먹었다. 그러면 시나브로 감의 단맛이 잉크처럼 온몸으로 번졌다.

나머지 시간은 아이 보는 일이었다. 아이는 배고프다며 자주 울었다. 잠시 아이를 내려놓고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왔다. 그리고 아이 입에 물렸다. 아이는 감을 먹으려고 애를 썼지만 껍질이 두꺼웠는지 떫었는지 먹질 못했다. 감을 던진 아이는 울다가 지쳤는지 조용했다. 등 뒤를 보면 내 등에 얼굴을 묻고 아이는 씩씩 잠이 들어 있었다.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간혹 동네를 구경했다. 멀리 우람한 신목(神木), 당산나무가 보였다. 영심이 집도 숙희 집도 보였다. 마을은 정겨웠다. 산 너머 먼 곳도 궁금했다. 땅도 파랬고 하늘도 파랬다. 지상과 천상을 잇는 거대한 줄기가 감나무였다.

그런 어느 날 하교하여 집에 오니 어머니께서 울고 계셨다. 내가 업어서 키우던 아이가 며칠 째 홍역으로 앓고 있던 때였다. 내 등에서 울고 웃던 아이가 별이 되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우는 바람에 울음을 꾹 참았다. 홀연 간다는 말도 없이 별이 되었다는 아이는 아무리 하늘을 봐도 없었다.

우리 집 뒤안 대밭에는 감나무가 있었다. 그 아래 장독대 항아리는 푸른 대나무 빛깔이 반사되어 늘 파란 빛이 났다. 바람도 파랗게 불었다. 간장도 파랬다.

오늘도 감나무 묘목을 몇 주 샀다. 해마다 봄이면 고향 집에 심었다. 품종도 개량되어서 맛도 좋고 크다. 하지만 옛날 그 감나무처럼 내 마음은 달래주지는 못했다. 난 늘 허전했다. 그 나무가 보고 싶었다. 어쩌면 별이 된 동생이 보고 싶은지 모른다. 이제 그 감나무는 없다. 도회지로 진학과 입대, 결혼과 취업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나는 그 나무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다른 사람들, 다른 세계에 있었다. 그 사이 감나무도 사라졌다.

내가 그 나무를 다시 찾은 건 퇴직 무렵이었다. 문득 외로웠다. 그때 그 심목(心木)이 불쑥 내게 다가왔다. 다음날, 시골집 뒤안으로 달려갔다. 감나무가 있던 자리는 흔적도 없었다. 눈부시게 충만한 하늘은 어디 가고 무심한 하늘만 펼쳐져 있었다. 낮별이 파란 구름 속에서 반짝 빛났다 사라졌다. 그 별이 문득 그리웠다.

지금 난 시골집 마루에 앉아있다. 햇살도 내 곁 마루에 앉아 조용히 졸고 있다. 사람은 죽으면 하늘로 간다. 그리고 별이 된다는 걸 안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하늘로 가서 반짝인다. 지금껏 너무 바삐 살았다. 아니 명예, 금전, 직위를 찾아 헤맸다. 아파트고 자동차고 돈을 찾아 밤낮으로 떠돌았다. 그런데 결국 헛것이었다. 신기루 같은 삶. 지금껏 영혼 없이 살았음을 이제야 안다. 세속의 단맛, 그 공허한 것들만 좆았다. 무용한 삶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외로울 때 내 곁에 있는 것은 그 신목(信木)뿐이다.

이제라도 난 나무가 되어 보려 한다. 움직이지 않고, 이 자리에서 앙상한 가지로 있으려고 한다. 그러면 나도 머잖아 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거기서 먼저 아이와 만났으면 좋겠다. 다시 만나도 내 등짝에 착 달라붙어 “배고프다.”며 또 칭얼거리다 잠들었으면 좋겠다.

박수근의 그림에 공감하는 것은 순전히 그 희뿌연 배경 때문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 배경 색깔이 풍경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여겨진다.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색깔, 그 시절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색이 아닐까.

누구나 마음 깊이 사랑 나무, 가족 나무, 인생 나무 한 그루씩 지니고 살아간다. 회색빛 박수근의 그림 한 점이 나를 위로해 준다. 우울한 기억을 우울한 색깔로 치유하는 기묘한 힘이 그의 그림에 들어있는 것 같다.

글이든 그림이든 이리 위로를 주어야 좋은 글이고 좋은 그림이다. 배고프다던 아이의 체온이 등으로 느껴진다. 회색빛 그림을 보는 동안, 어느새 내 몸에도 그의 희뿌연 나무들이 들어와 뿌리를 내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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