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은 논밭일 뿐…땡볕 아래 ‘위험한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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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은 논밭일 뿐…땡볕 아래 ‘위험한 농사’
농촌 어르신 외로운 삶, 오늘도 집 밖으로 돈다 <1> 폭염에도 들녘으로
아무 일도 안하면 오히려 답답
딸은 그만하라는데 손 놓을 수 없어
잇단 열사병 사망 등 건강 위협
공동체 중심 돌봄 네트워크 구축
건강 교육·응급 매뉴얼 체계화해야
2025년 08월 25일(월) 20:35
연일 폭염이 계속되는 25일 광주시 서구 벽진동 밭에서 농민이 호박에 물을 주고 있다. /나명주기자mjna@kwangju.co.kr
“논밭에 나가지 말라”는 외침이 무색하게 광주·전남 농촌에는 연이은 폭염에도 매일 대문을 나서는 노인들이 적지 않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마을은 텅 비었지만 남아 있는 어르신들은 평생 밴 습관, 외로움, 무료함을 참다 못해 오늘도 땡볕에 집 문을 나선다. 도시에 거주하는 자식들은 매일 전화해 폭염 때 나가지 말라고 하소연하고 ‘협박’(?)을 하며 엄포를 놓지만 부모의 건강과 외로움을 가까이서 챙겨줄 수 없는 답답함에 안절부절한다. 고령화·마을 소멸이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광주·전남 농촌 노인들이 겪는 일상을 따라가며 우리 사회가 앞으로 준비해야 할 지역 복지의 방향성을 4차례에 걸쳐 탐구한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으로 건강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더위가 매우 심한 오후 시간에는 외출과 야외 활동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낮 최고체감온도가 35도를 웃돌았던 지난 22일 오전 10시께, 화순군 도곡면의 한 마을에서는 타는 듯한 더위 속에 마을 어귀에 설치된 스피커로부터 안내방송이 온 동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논밭에 나가지 말라”는 안내 방송은 들리지 않는지 인근 논과 밭에는 70~80대 노인들이 허리를 새우처럼 굽힌 채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다. 웃옷이 온통 땀에 젖고, 흐르는 땀에 차양 모자가 자꾸 미끄러졌지만 노인들은 아랑곳않고 연신 풀을 매고 있었다.

대곡리에 거주하는 정진순(여·72)씨는 수년 전 더위에 쓰러진 적도 있지만, 이날도 어김없이 풀을 매러 밭으로 나왔다.

정씨는 “몇 년 전 딱 요즘같은 날씨에 오전 6시부터 나왔는데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아른아른했다. 남편이 남은 밭고랑 두 줄 마저 하고 들어가자길래 참고 일했더니 결국 쓰러졌다”며 “근처 식당으로 달려가 호스로 몸에 물을 뿌리고 정신을 잃었는데, 죽다 살아났다. ‘이것까지만 하고 가야지’ 하고 욕심 냈다간 아차 하는 순간 쓰러지는 거다”고 말했다.

노인들은 지난달 곡성군 고사리밭, 해남군 깨밭에서 80대 노인들이 연달아 열사병으로 숨졌다는 소식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날마다 작물을 돌봐줘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사명감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노인들은 좀처럼 논밭으로 오는 발길을 끊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대곡리의 깨밭에서 잡초를 뽑던 기명순(여·80)씨는 남아 있는 사람이 없어 적막해진 농촌에서 적적하게 하루를 보내다 보니 갈 곳이 깨밭밖에 없다고 했다.

기씨는 “새벽 5시만 되면 자연스럽게 일하러 나온다. 마을 노인이라고 해봐야 다 죽어버렸고 회관 나오는 사람도 날마다 보는 5~6명 뿐인데, 같이 놀 사람이 없다”며 “요즘 할매들도 뉴스 보고 더위에 사람 쓰러진다는 거 알지만, 깨 키워서 자식들 보내주는 게 삶의 유일한 낙인데 어쩔 수 있느냐”고 말했다.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외롭고 답답하다는 노인도 많다.

김복순(여·83)씨는 “작년 이맘때쯤에는 이렇게 안 더웠는데 올해는 날씨가 징하게 덥다. 서울 사는 딸이 농사 그만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계속 해오던 일을 하루아침에 손 놓을 수 있겠느냐”며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밭일이라도 안하면 뭘 하겠나. 마을회관가서 동네 사람들 만나 이야기 몇 마디 나눠도 외롭고 답답한 마음은 어떻게 못 한다”고 말 끝을 흐렸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광주·전남에서 발생한 온열질환자 341명(광주 57명·전남 284명) 중 30%를 넘는 89명이 65세 이상 고령 환자다.

지난해에도 논밭에서 온열질환으로 쓰러진 고령 환자는 광주 7명, 전남 69명 등 76명에 달했다. 특히 온열질환으로 사망한 이들 중에서는 논밭 일을 하다 쓰러진 노인들의 사례가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재난’에 가까운 폭염 속에서도 노인들이 밖으로 나오는 건 결국 사회 문제와 연결돼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농촌 고령화로 인한 지방 소멸과 돌봄네트워크 부족, 사회적 교류 부족 등으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노인들이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김지은 전남대 생활복지학과 교수는 “폭염 등 재난에도 불구하고 외로움, 농사 습관 등으로 논밭을 찾는 노인들의 건강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누구나 걱정 없이 모이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을 단위의 소규모 공간을 마련하고 공동체 중심의 돌봄 네트워크 구축이 중요하다”며 “특히 정신건강 상담과 고독사 예방 교육, 사회적 교류 프로그램을 운영해 노인들의 심리적 안정과 사회적 연결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서 조선이공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단순히 폭염 시 작업 중지를 권고하는 정도를 넘어서 마을 이장, 생활지원사, 자원봉사자 등을 활용해 고령 농민에게 안부 전화 및 현장방문을 하는 ‘돌봄 네트워크’를 촘촘히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보건소·지역 병원, 노인복지시설과의 연계로 현장 건강교육·사전 경고·응급 대처 매뉴얼을 체계화해, 외로운 농촌 노인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서민경 기자 minky@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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