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초원에 뿌리 내린 ‘고려인 한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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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초원에 뿌리 내린 ‘고려인 한글문학’
고려인문화관, 광복80주년 기획전
작가 60여명 작품·시기별 연표 등
2025년 03월 05일(수) 20:15
고려인문화관은 기획전 ‘중앙아시아 초원에 피어난 고려인 한글문학’을 내년 2월 28일까지 연다.
모국어를 잃어버린 민족은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언어는 정신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다. 광복은 주권을 되찾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의 언어를 되찾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려인 동포들에게 한글은 ‘뿌리’와도 같다.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직후 단행된 모국어 교육금지는 무엇에 비할 바 없는 고통이었다.

고려인 한글문학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광복 80주년 기념 기획전으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에서 내년 2월 28일까지 진행 중인 ‘중앙아시아초원에 피어난 고려인 한글문학’이 그 것.

전시실에 들어서면 ‘고려인 한글문학’ 작가들의 프로필 사진이 관객을 맞는다. 어림잡아 60여 명에 이르는 작가들은 독자적으로 한글문학을 추구했던 당대 문인들이다.

조명희 소설가, 강태수 시인, 조기천 시인, 김준 시인, 연성용 극작가, 김기철 소설가, 계봉우 시인, 주송원 시인, 김창욱 시인, 림하 시인, 차원철 시인, 기석복 소설가, 리상희 평론가, 진우 시인, 김인봉 시인, 박칠 평론가 등이다.

이들 문인들은 토대가 허약했던 중앙아시아 현지에서 한글문학의 개화를 위해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한글문학이 이역만리 ‘동토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이어질 수 있었던 데는 독립운동가들과 교육자들의 남다른 헌신이 있었다. 지난 2021년 고려문화관 개관 당시 전시됐던 독립운동가이자 고려인 한글 교육에 매진했던 리상희·주동일 부부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다.

“강제이주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남은 건 절망뿐, 주동일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맨발로 피 흘리며 수없이 넘어졌다 일어서야 했다. 소련 정부의 거짓과 위선은 그동안 쌓아온 주동일의 신념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남편의 죽음과 강제이주를 체험한 주동일에게 스탈린 체제는 거짓으로 위장한 가혹한 압제체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 고려인문화관에 ‘선구자의 가슴에 흐르는 불멸의 사랑 노래’라는 주제로 마련된 전시실에는 조국의 독립과 고려인들을 위해 모국어 교육에 헌신했던 이들에 대한 자료 등이 비치됐다.

이번 고려인 한글문학 기획전에서는 시기별 주요 흐름의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1920년대 연해주에서 시작된 한글문학은 이후 고려인들이 강제이주되면서 중앙아시아에 이식됐다. 1938년 발간된 모국어 신문 ‘레닌기치’를 중심으로 왕성한 창작활동이 이루어졌다. 또한 민족극장 ‘고려극장’에서 희곡이 연극으로 구현돼 대중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문 빅토르 작 ‘1937년 강제이주열차’
먼저 1923년부터 1937년까지 ‘전근대의 선잠에서 깨어’는 한글문학이 시작된 당시의 자료들이 주를 이룬다. 신문 ‘선봉’이 창간돼 작가들에게 문예활동의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조명희는 제자를 양성하고 시화집을 발간하는 등 문학적 토대를 닦았다.

‘비극의 여명’(1938~1956)은 고려인 작가들의 시련기라 할 수 있다. 시인 강태수는 대학 벽신문에 ‘밭달던 아씨에게’를 게재했다고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며 조기천 시인은 추방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열릴 듯 열리지 않은 세계’(1956~1988)는 해빙기 도래로 한계 내에서 일정 부분 표현의 자유가 주어진 시기다. 소련작가동맹 산하 고려인분과가 태동해 한글문학을 견인했으며 한글문학단행본이 편찬됐다.

‘환류와 유출’(1945~1990)은 소련에 유학한 북한 학생 일부가 망명하면서 고려인 한글문학에도 나타난 변화상을 담고 있으며, ‘전투가 끝나버린 평원에서’(1989~2008)는 강제 이주 사건을 다룬 작품들을 조명한다.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해진 시기부터 대를 이을 후속 작가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까지를 아우른다.

마지막으로 ‘빛과 그림자’에는 고려인 한글문학이 공동체를 지탱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김병학 관장은 “고려인 작가들은 오랜 사상적 부자유 속에서도 모국어문학의 가치를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선배 작가들이 열망해왔던 꿈들이 현세대 고려인들에게 이어진다면 전 세계 고려인 구성원들을 글로벌한 한민족공동체 일원으로 견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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