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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백제서 이어진 정서 서울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영암 출신 조정 시인 전라도 방언으로 쓴 시집 ‘그라시재라…’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500개 방언 표준말 풀이 색인 첨부
2022년 06월 27일(월) 20:10
“나는 꽃 중에 찔레꽃이 질로 좋아라/ 우리 친정 앞 또랑 너매 찔레 덤불이/ 오월이먼 꽃이 만발해가꼬/ 거울가튼 물에 흑하니 비친단 말이요/ 으치께 이삔가 물 흔들리깜시/ 빨래허든 손 놓고 앙거서/ 꽃기림자를 한정없이 보고 있었당께라”

시집 첫머리에 실린 ‘서시’를 읽다 보면 절로 전라도 말맛에 빠지고 만다. 어린 시절 동네 어귀에서 들었던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의 말을 듣는 것 같다. 정이 듬뿍 담긴 전라도 말은 언제 들어도 정겹고 아련하다.

시집을 한 권 받았다. 문학 기자가 소설집이나 시집을 받는 것은 늘 있는 일이라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간혹 이색적인 작품집이 눈에 띌 때가 있다. 이번이 그런 경우다. 시집 ‘그라시재라, 서남 전라도 서사시’는 맛있는 음식을 아껴 먹듯 작품 하나씩을 음미하듯 읽고 싶은 책이다.

“마한이나 백제로부터 이어진 우리 정서를 어떻게 서울말 혹은 표준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남도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전라도 말 사용해도 아무렇지 않을 때가 곧 올 것입니다.”

무엇보다 작품이 모두 전라도 방언으로 돼 있는데다 시집 제목 또한 전라도 방언이어서 이채롭다. 시집 표지 바탕이 샛노란 색인데다 제목은 거친 붓글씨로 씌어 있다. 첫눈에도 전라도 정서가 물씬 배어나오는 시집임을 알 수 있다.

영암 출신 조정<사진> 시인은 “전라도 여성들의 순정하고 굳센 말맛을 살리기에 주안점을 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남 전라도 여성들이 어떻게 서로를 돌보며 삶을 이어 왔는가를 시로 표현해보고 싶었다”며 “1960년대 전라도 영암에서 살던 여성들의 실화를 서사시로 옮긴 것”이라고 언급했다.

시집 발간 소식을 전하는 시인에게선 익숙한 전라도 방언이 들려왔다. 현재 거주하는 곳은 경기도 고양시이지만, 그는 여전히 전라도 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었다.

“영암에서 태어나 장성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시댁은 전북이구요. 제게 남도는 늘 그립고 아련하고 사람살이의 맛이 나는 고향으로 남아 있지요.”

시인은 지난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이후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을 펴냈으며 2017년 제주 강정마을의 아픔과 생태를 주제로 장편동화 ‘너랑 나랑 평화랑’을 출간했다. 2011년에는 거창평화인권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꾸준히 문학의 길을 걸어왔다.

이번에 낸 시집은 기존의 작품과 결이 다르다. 전라도 방언으로 시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7~8년 전이었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마을 할머니들의 대화가 떠올랐고 몇 가지 이야기를 글로 적어 페이스북에 올렸어요. 물론 그때 그 시절 이야기들이니 그분들이 사용하던 말로 적는 게 실감나고 말맛도 살아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쓰다보니 그렇게 기억이 계속 되살아났지요.”

할머니들은 곧잘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지금도 그 말들은 귀에 생생하다. “사노라면 굳이 살아지니라, 삶은 구슬과 같다. 금간 구슬도 고요히 아름다운 법이다. 꿰어두어라”

시인은 전라도 여러 지역 말이 조금씩 다른 것 같다고 얘기한다. “유년기를 보냈던 장성 쪽은 영암을 비롯한 서남쪽보다 부드럽고 전북 말씨에 가까운 편”이라는 것이다. 이번 시집의 서사시(이야기)는 서남 해안 지역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집을 읽다보면 마치 전라도 여성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다. 동란을 겪으며 자식과 형제를 그리고 부모를 잃은 여성들이 어떻게 삶을 부여잡고 서로 의지하면 살았는지 절로 가슴 한켠이 뭉클해진다. 아니 전라도 말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집은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서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2부는 마을을 휩쓸고 간 무참한 슬픔이 등장한다. 3부에는 여성들의 아픈 사연이 이웃 여성들의 이야기 속에서 정화되는 내용이 나온다. 4부와 5부는 각각 동란을 겪은 여성들의 극복 과정, 죽음을 통과한 이들이 이웃을 생각하며 거대한 합창을 부르는 내용을 담았다.

서효인 시인은 ‘당신의 말이 이렇게 시가 되었습니다’라는 발문에서 “그들은 서로가 긴밀하게 알아듣는 말투의 공동체로 엮이었고 그 이유로 그들은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 겪고 내 이웃의 사연과 사정에 귀 기울입니다. 곁의 사람의 말을 다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라시재라. 그러믄요”라고 평한다.

한편 시집 뒷 부분에는 전라도 방언이 낯선 독자를 위한 색인이 붙어 있다. 시집에 수록된 방언 중 500개를 뽑아 예문을 곁들여 표준말로 풀이했다. 사료적 가치가 높은 부분이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