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부디 글자 좀 키워 주세요-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2022년 05월 03일(화) 00:15
다산 정약용의 시 ‘노인의 한 가지 쾌사’(老人一快事) 여섯 수는 재미있다. 늙으니 머리털이 빠져 시원하고, 이가 없으니 치통이 사라지고, 귀먹으니 싫은 소리를 안 들어도 되고, 붓 가는 대로 글을 써도 되며, 바둑도 편하게 두니 좋다.

여섯 가지 중 세 번째가 눈이 어두운 것이다. 이젠 늙어서 안개 속의 꽃처럼 앞이 흐리니 눈초리를 번거롭게 할 것도 없고, 티끌처럼 새긴 자디잔 글자를 읽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평생 겪어온 ‘문자에 대한 거리낌’(文字累)에서 벗어나 강호의 풍광과 청산만 눈에 담아도 충분하다.

전전긍긍하며 노심초사하던 젊은 시절과 달리 글쓰기나 바둑 두기를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건 편하고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신체의 노쇠로 인한 고통은 어디까지나 쾌사가 아니라 ‘고사’(苦事)다. 다산은 그런 고통을 반어적, 해학적으로 읊음으로써 공감을 얻고 있다.

나는 어떤가. 칠순이 넘은 지금 이가 아예 없어 임플란트로 다 때웠으니 치통이 없는 건 맞다. 요즘 노인들이 살아가기에 가장 편한 점은 바로 치과 기술의 발달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눈이 어두운 것은 극복하기 어렵다. 눈앞에 불꽃 같은 것이 어른거리는 안화(眼花), 흑화(黑花)나 날것이 날아다니는 비문(飛蚊)은 아무리 눈을 비벼도 사라지지 않는다. 단원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에 쓰인 화제(화題) ‘노년화사무중간’(老年花似霧中看), 즉 노년에 보는 꽃은 안개 속을 보는 것 같다는 말 그대로다.

나는 ‘질사모’, 질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이다. 불세출의 이탈리아 테너 베니아미노 질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모여서 음악 듣고(주로 질리의 노래) 좋은 음반, 책 정보를 공유하는 문화 모임인데, 코로나19 이후 음악회를 가기가 어려워짐에 따라 질사모의 주된 활동은 전시장 순례로 바뀌게 됐다.

요즘 우리나라 전시는 정말 다양하며 그 기획과 기법이 놀라울 정도다. 언제 이렇게 발전했을까. 큰 박물관이든 이름이 덜 알려진 작은 미술관이든 전시의 수준이 고르고 높다.

아쉬운 것은 전시 작품에 대한 해설문, 벽에 붙인 명제표 등의 글씨가 너무 작고 잘 보이지 않는 점이다. 조명은 대체로 은은하고 침침한데 글자는 한결같이 작고 잘아서 불편하다. 글자가 틀리거나 문장까지 비문(非文)인 경우 읽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불평을 하게 된다. 글자를 작게 하는 것이 시대의 조류이고 유행이며 젊은 감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한문투성이인 서예전은 불편이 더 크다.

일상적으로 더 자주 접하는 책에 대해서는 할 말이 더 많다. 장정은 화려하고 제목은 세련되고 멋은 한껏 부렸는데, 정작 읽기에 불편하다. 글자가 작은 데다 내용을 강조한답시고 글자에 색을 입힌 경우는 읽고 싶지 않게 된다. 색맹이나 색약자는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특히 한문이나 한시를 번역한 책이 문제다. 한자는 한글보다 획이 많아서 같은 크기로 실으면 읽기 불편한데도 한글의 절반 또는 그 이하 크기로 한자를 병기한 책들이 많다. 번역서에 한자 원문을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데 무슨 장식물처럼 마지못해 한자를 작게 싣는 것은 무성의·무책임을 넘어 몰지각한 일이다.

나는 어느 출판사 간부와 이 문제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읽으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꼭 돋보기를 들이대고 봐야 되느냐?”고 따졌다. 그의 대답은 어차피 사람들이 한자는 잘 보지 않는다, 한자를 크게 내세우면 젊은이들이 더 외면한다, 요즘 책을 만드는 감각이 그렇다, 이런 식이었다.

한자만 보면 기겁을 하고 기절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한글 전용을 핑계 삼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겉보기에만 좋고 읽기 불편한 것은 제대로 된 책이 아니다. 전시 설명문이든 안내 팸플릿이든 책이든 할 수 있는 한 글자를 좀 키워 달라. 특히 한자는 더 커야 된다. ‘늙기도 설워라커든’ 읽지도 못하게 해서야 말이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