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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목싸목, 수 천년 나주 역사로 시간 여행
고대 마한 최후의 중심지 나주
원도심 나주읍성 4대 문 복원
고려·조선시대 지방궁궐 금성관
전통문화체험 공간 목사내아
조선시대 건축 모범 나주 향교
2022년 04월 20일(수) 17:10
금성관 야경
지금의 나주시 다시면 회진포는 울산항과 평택 남양항과 함께 신라 3대 포구 중 하나로 남해안 지역의 대표적인 국제항구로 명성을 떨쳤다. 나주가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이었다는 학자들의 표현은 번영과 중흥을 이뤘던 당시 모습을 조금이나마 짐작케 해준다.

나주는 고대 마한 최후의 중심지로 꼽힌다. 지금으로부터 999년 전, 고려 제 8대왕 현종은 이 곳 나주를 주목했다. ‘영산내해’ 열린 바닷길과 통하던 그 시절, 영산강은 그 자체로 바다였다. 나주는 바다를 통해 보다 넓은 세계와 교류하고 소통하며 이탈리아의 베니스와 같은 선진 문물의 창구이자, 재창조의 발신기지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신라 말, 고려 초 나주는 고대사회를 마감하고 중세사회로 여명을 열었다. 나주는 격동의 시대에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역사적 힘을 갖고 있는 도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나주를 소경(小京)으로 비유했다. 큰 강과 4대 문을 비롯해 도시의 모양과 기능이 한양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영산강은 나주의 한강이었고, 나주는 전라도의 중심지였다.

나주향교 대성전
나주여행은 마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천년의 역사를 만나는 시간여행이다.

나주 원도심을 감싸고 있는 나주읍성 4대 문은 2018년 복원을 마쳤다. 사적 제337호 나주읍성은 서울 도성(都城)과 같이 고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4대 문을 비롯해 금성관, 나주목(牧)문화관, 나주목사내아(금학헌)로 구성돼 있다. ‘나주읍성’ 여행은 나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는 시간이다.

금성관(보물 제2037호)은 나주읍성 한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지방궁궐이자 객사로 나주가 호남의 웅도로써 그 중심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역사유적이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를 의미하는데 조선시대 객사 건물 중 금성관이 규모가 가장 크다. 금성관은 ‘의향’ 나주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발발 시, 건재 김천일 선생이 호남의병 출정을 알렸던 장소였고, 일제강점기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나주 유생들이 금성관에서 통곡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금성관 옆에 위치한 나주목문화관은 983년 나주목이 된 이후부터 1895년까지 나주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 ‘나주읍성 둘러보기’ 등 6개 공간으로 구성돼 있으며 나주의 역사변천과 인물, 읍성내 관청 등에 대해 상세하게 접할 수 있다. 고려~조선시대에 걸친 지방행정단위 였던 ‘목’에 관한 전시가 이뤄지고 있으며 320여명에 이르는 나주목사들의 명패와 목사의 하루일정 등도 살펴볼 수 있다.

나주목문화관
나주목사내아는 1000년의 역사 동안 수많은 나주 목사들이 한양에서 나주에 내려와 살았던 집이다. 목사내아는 금학헌(琴鶴軒)으로도 불렸는데 성안에 있던 관아건물 가운데 금성관(객사)과 정수루(동헌 출입문)와 함께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는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 유명한 ‘학봉 김성일 방’과 ‘독송 유석증 방’, 인·의·예·지 실이 마련돼 있어 숙박체험도 할 수 있다. 수백 년 째 목사내아를 지키고 있는 유명한 팽나무도 만날 수 있다.

사적 제 483호로 지정된 나주향교는 앞에 제사공간을, 뒤에 학습공간을 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를 지닌 전형적인 조선시대 향교의 건축모범을 보여주는 사례다. 조선시대 교육시설의 규모를 따지면 성균관 다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교육과 제사 고유기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금성관에서 나주향교까지는 500여m 거리. 나들이 하기 좋은 봄, 이 길을 싸목싸목 걸으며 나주 역사를 음미해보는 것은 어떨까.

/전은재 기자 ej6621@kwangju.co.kr

/나주=손영철 기자 ycson@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