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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엄마' 엄정애 작가 “‘머머리 인형’ 마을로 초대합니다”
31일까지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폐옷가지·신문·폐박스 등 활용 다양한 이야기 작품에 풀어내
5·18 40주년 기념 시민들과 인형 45개 만들어
애니메이션 ‘바리공주’도 제작
집은 미국이지만 광주 정착 고려 중
2021년 01월 26일(화) 04:00
‘인형엄마’ 엄정애(65) 작가가 한달 간 문을 연 ‘인형의 집’에 다녀왔다. 엄 작가가 ‘다른 시절로 가는 듯한 시간의 문이 있는 곳’이라 멋지게 표현한 광주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225-25번지)에서 열리는 ‘머머리 인형’전이다. ‘머머리’는 ‘흐르는 물에 떠내려온 작은 퇴적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자신의 인형과 닮은 것 같아 그리 부른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인형은 제각각 사연이 있고, 제작 방법도 다 다르다. 그림책에 등장하는 주인공같은 인형엄마 이야기를 듣다보면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사람들은 엄 작가의 설명을 들으며 개구리 인형을 쓰고 사진을 찍고, 손가락 인형으로 동화구연도 해본다. 딱 한 사람만 관람할 수 있는 ‘상자인형극’ 장치 등 전시장 곳곳에선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붉은 벽돌, 담쟁이 덩굴 등이 어우러진 전시장에서 인형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이들보다 어른이 더 즐거운 전시다.

엄 작가의 명함엔 ‘366 인형엄마’라고 적혀 있다. 그는 ‘좋아서 하는 일’이라 1년 365일하고도 ‘하루’ 더 인형을 만든다는 의미라며 웃었다.

‘인형엄마’ 엄정애 작가가 인형을 머리에 쓰고 포즈를 취했다. 뒤는 미국인 시어머니 인형.
오는 31일까지 계속되는 전시에는 그가 미국에서 들어올 때 슈트케이스에 담아온 5cm 작은 인형부터, 지난 1년간 한국에 머물며 시민들과 작업한 3m가까운 큰 인형까지 다채로운 작품이 나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는 간호학을 공부했다. 손재주가 좋아 엄마 속바지 잘라 인형 옷을 만들곤 했던 그녀는 1976년 ‘종이와 인형’ 극단에서 인형을 만들기 시작한 후 2000년 창단한 극단 ‘인형엄마’를 통해 인형극과 인형만들기를 이어왔다.

미국에 정착하기 전 해외입양아의 부모 찾아주기에 적극 나서기도 했던 그는 결국 엄마를 만나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나는 입양아에게 선물로 들려준 한지 인형 다섯 점이 계기가 돼 인디애나폴리스 박물관에서 전시를 열게 됐고 미국 워크숍에 참여해 큰 인형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12년 째 미국 미네아폴리스에 살고 있는 엄 작가는 지난 2019년 전남대 시민대학이 진행한 큰 인형만들기를 통해 광주와 인연을 맺었다. 시민, 지역 예술가들과 인형을 만들고, 일인 인형극을 소개하는 테이블 인형극제, 워크숍 등을 진행했던 그는 지난해 봄 광주를 다시 찾았고,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다음 해가 5·18 40주년이라는 말에 꼭 와서 시민들과 함께 인형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 광주에 왔을 때 오월 기록관을 찾고 책도 읽으며 오월에 대해 알아갔고, 밤마다 울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했죠. 기회가 되면 당시 세상을 떠난 165명의 인형을 금남로에 세우고 싶었습니다. 결국 광주 아티스트 6명, 시민들과 힘을 합쳐 45개의 얼굴인형을 만들었죠. 시민들은 직접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셔서 함께 풀칠하고 인형을 만들어나갔죠.”

윤상원 열사 등 엄 작가와 시민들이 만든 커다란 얼굴 인형을 쓴 이들은 오월시민행진을 펼쳤고, 이 때 현장 사진은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엄 작가의 작업은 한지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폐신문지와 폐박스 등을 활용한다. 인형옷 역시 버려진 옷가지를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전시에서는 커피 필터를 붙여 만든 인형 작품도 전시됐다. 지인들이 택배로 보내준 커피 박스, 야채 박스도 그의 손을 거쳐 멋진 작품이 돼 전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을 거치면 버려졌던 물건들도 새로운 생명을 얻는 셈이다.

전시장에서 눈에 띄는 건 신문지와 사료 포대로 만든 3m 높이의 거대한 인형이다. 포항 도시재생사업에 참여했던 엄 작가가 ‘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어 작업한 작품으로 자세히 들여다 보면 류시화의 시 한구절이 새겨져 있다. 입구에 설치된 대형 얼굴 인형은 엄 작가의 시어머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해 홀로 두 아이를 키운 엄 작가는 음악을 하던 미국인 남편을 과천 마당극축제에서 만났고, 아이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미국으로 떠났다.

어릴 적 늘 학교로 엄정애 작가를 데리러 오곤 했던 할머니.
전시장 바닥 낙엽 사이에 숨은듯이 놓여 있는 5cm크기의 작은 인형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트럭 위에 타고 있는 여러 명의 소녀 인형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이다. 늘 학교에 자신을 데리러 왔던 할머니와 어린시절 엄작가의 모습이 담긴 인형을 보면 웃음이 번지고, 그림책 속에서 막 뛰쳐나온 듯한 다채로운 인형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또 그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바리공주’도 만날 수 있으며 광주에 머물며 새롭게 시도한 동판화 작업과 평면회화 작품도 처음으로 선보인다.

“사람들과 인형을 만들 때 저는 ‘종이선(禪)’이라는 말을 해요. 인형을 만드는 종이를 가져오면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지거든요. 사람들이 인형 만드는 게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출국하지 못하고 현재 시내 원룸에 머물고 있는 엄 작가는 “광주에서 너무너무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며 아예 광주에 정착하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품어주고, 그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인형을 만드는 ‘인형엄마’가 함께한다면 광주엔 언제나 ‘동화같은’ 아름다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