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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학과 ‘근대’ 담론
2020년 11월 17일(화) 06:30
백 낙 청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다산 선생의 업적에 대한 인식이 점점 증대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다산이나 실학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끈질기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하며 일부 언론의 적극적 응원을 받는 주장이 다산을 포함한 실학의 ‘근대성’이 과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근대야말로 문명개화의 시대이고 실학이든 무엇이든 근대로의 전환을 얼마나 선도했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좌우된다는, 전형적인 근대주의적 주장이지요.

이에 대해 다산 선생이 비록 ‘근대적’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근대 지향적’이었다고 응수하는 것은 다소 궁색한 변명으로 들리기 쉬우며 기본적으로 근대주의 사고의 틀, 이른바 저들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일입니다. 다산이 당대의 적폐를 파헤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를 지향했다는 것은 그의 사상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결과가 되겠지요. 그는 당신의 표현으로(물론 유교 전통에 있는 표현입니다만) ‘도심’(道心) 곧 수신을 통해 살린 인간 본연의 착한 성품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었지, 수양 없는 무리들의 탐욕을 포함한 일상적 감정 곧 ‘인심’(人心)을 예찬하며 심지어 작동의 원리로 삼는 자본주의 근대를 지향했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물론 그의 사상에는 근대의 어떤 특징들을 선취하고 예비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런 요소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며 정확히 어느 정도로 오늘 우리의 근대 적응을 도와줄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도 다산학의 중요한 과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제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는 다산사상이 도저히 근대 세계 체제와 양립할 수 없는 어떤 요소들을 지녔으며, 그러한 요소가 오늘날 무작정 이 체제에 순응만 하다가는 자멸하게 마련인 현대 인류에게 어떤 활로를 열어 줄 수 있을지를 밝혀내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그 두 가지 과제는 별개가 아닙니다. 극복 노력이 없는 적응만으로는 적응조차 결국 불가능하려니와, 적응은 안 하고 극복만 하려는 노력 역시 실효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마디 곁들인다면, 다산이 근대를 지향하거나 선취했다고 말하면서 그가 지향한 근대는 자본주의적 근대와 본질적으로 상이한 ‘대안적 근대’임을 강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취지는 이해합니다만, 저는 이것이 두 가지 면에서 생산적인 담론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자본주의적 근대 세계 체제가 이미 전 지구를 덮고 있는 세상에서 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관건적인 질문을 회피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대안적 근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지요. 또한 ‘대안적 근대’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자본주의 무서운 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 아닐까 합니다.

둘째, 자본주의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근대’와 ‘현대’를 구별 못하는 영어 등 서구어 사용자들과 달리 ‘대안적 현대’라는 말을 쓰는 게 적절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서양의 언설에 너무 물이 들어서 항상 영어나 다른 서구어의 표현이 원문이고 그걸 번역하는 일이 우리 몫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역사상의 한 시기로서의 ‘근대’와 자기가 살고 있는 시기로서의 ‘현대’를 ‘모던’(modern)이라는 하나의 낱말로 통칭하는 것은 저들의 어휘 부족일 뿐입니다. 그런 언어적 빈곤을 모르는 우리 동아시아인들이 자본주의 시대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를 ‘대안적 현대’로 표현하고, 이걸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지에 대한 고민은 영어권 인사들에게 맡겨 놓았으면 합니다.

따라서 저는 자본주의 근대에 적응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해 가야 하는 우리 시대의 과제를 ‘대안적 근대의 추구’가 아닌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의 이중 과제’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딱히 그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앞으로 다산 선생의 저작을 훨씬 깊고 넓게 공부해 오신 분들이 저의 이런 문제의식을 다소나마 수용하면서 연구와 토론을 해 나가셨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저는 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