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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일흔네 돌 한글날을 보내고
2020년 10월 22일(목) 00:00
얼마 전 텔레비전을 통해 나훈아 공연을 보며 한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의 입에서 생뚱맞은 단어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가 생길 수 없다.”

위정자는 ‘정치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말의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데, 왜 이런 엉뚱한 말이 나왔을까. 아무래도 위정자(爲政者)를 ‘위선적인 정치인’쯤으로 생각한 것 아닌가 싶다. 노래는 참 좋았는데, ‘옥의 티’였다고나 할까.

엊그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에게 ‘오랜만이에요’라고 문자를 보냈다. 상대방도 ‘정말 오랫만이네요’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나는 ‘오랜만’인데 그는 ‘오랫만’이었다. 이럴 땐 늘 마음이 편치 않다. 아마도 직업병일 것이다.

해마다 한글날이 들어 있는 10월이면 너도나도 우리말·우리글 사랑을 외친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콩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으면 됐지, 그까짓 것 어법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듯 별로 신경을 안 쓴다.

모범이 되어야 할 방송사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최근 함평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철학자 최진석 교수가 들려준 경험담이다. 아마도 한글날 무렵이었을 것이다. 뉴스 진행자가 한참 우리말 사랑을 강조하더니 “곧이어 ‘픽 뉴스’가 있겠습니다” 하더라는 것이다. 방송사에서는 ‘콕 꼬집어 말해 준다’는 뜻으로 ‘픽(pick) 뉴스’라는 제목을 달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픽 뉴스’라는 말을 들으니 나 또한 ‘픽’ 터져 나오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포주보다 못한 언론이라니



최 교수는 또 다른 강연에서도 이를 지적한다. “요즘 방송을 보면 프로그램 제목에 온갖 영어가 난무합니다. ‘오 마이 베이비’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아이고 내 새끼’ 하면 왠지 촌스럽게 들리죠? 이런 사례는 한둘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요.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이 외부에서 만들어진 것을 더 권위 있고 고급스러운 대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렇다면 방송만 그럴까? 아니, 신문도 마찬가지다. 부끄럽지만 지금부터는 ‘자가비판’에 들어간다. 일간지의 경우 대부분 각 면의 성격을 말해 주는 제목을 지면 맨 윗부분에 배치한다. 광주일보는 그중 사람들의 동정을 소개하는 20면 제목으로 ‘사람과 생활’이라는 뜻의 영어(‘People & Life’)를 사용하고 있다. 2면 제목의 경우도 한글로 쓰긴 했지만 ‘투데이’라는 영어 이름을 붙였다.

영어 사용은 다른 신문들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중앙일보의 경우 ‘투데이’를 인물 소개 면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같은 면에서 ‘사람과 이야기’라는 뜻의 영어(‘People & Story’)를 원어 그대로 쓰고 있으며, 동아일보는 ‘피플 & 투데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방송에서 흔히 쓰는 앵커라는 말도 나는 마뜩하지 않다. 이 용어는 1952년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사의 전설적인 뉴스 진행자였던 월터 크롱카이트로부터 생겨났다고 한다. ‘앵커’(anchor)의 원래 뜻은 배를 한곳에 멈추어 있게 하기 위해 줄에 매어 물 밑바닥으로 가라앉히는 ‘닻’이다. 결국 앵커는 ‘뉴스의 닻’ 역할을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자리라는 뜻을 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앵커 대신 ‘뉴스 진행자’라는 말을 쓴다 해서 그 역할의 중요성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나는 출퇴근길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51번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있다. ‘색시집’ 간판들이다. 한데 외래어나 외국어로 된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불나비’ ‘입술’ ‘안개꽃’ ‘천년의 사랑’ ‘쉿!’ 등등.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끝내주는 집’이다. 중의법(重義法)을 사용해 업소의 성격까지 잘 드러내는, 정말 ‘끝내주는’ 이름 아닌가. ‘쉿!’도 뭔가 은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누가 이런 기막힌 이름들을 지었을까? 색시들인가, 포주들인가? 어찌 됐든 문득 이들이 언론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바르고 고운 언어를 사용해야 할 ‘언어운사’(言語運士, 아나운서)들마저 때로는 ‘역대급’ 등 말도 안 되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1도 모른다’ ‘1도 없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처음 들을 땐 무슨 말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하나도 모른다’ ‘하나도 없다’란 뜻이란다. 예를 들면 ‘부러울 것 하나도 없다’를 ‘부러울 것 일도 없다’라고 한다. ‘영화에 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게 없다’ 해야 할 것을 ‘영화에 관해서는 일도 아는 게 없다’라고 한다. 마치 ‘두 시 삼십 분’이라 해야 할 것을 ‘이 시 설흔 분’이라 말하는 것처럼 어색하다. 하지만 알고도 그러는 건지 몰라서 그러는 건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테스 형이 우리 앞에 온다면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법에 맞지 않은 말들을 마구 쓴다. 지난번 추석 때 우리는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어느 식당 주인은 손님들에게 ‘맛있는 저녁 되세요’라는 손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이 말들을 말 그대로 해석하면,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에게 ‘한가위’나 ‘저녁’이 되라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한가위’가 되고 ‘저녁’이 되나. 아마도 이런 것은 영어 번역투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모두 비문(非文: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일 뿐이다. ‘한가위 즐겁게 보내세요’ ‘저녁 맛있게 드세요’ 하면 얼마나 자연스럽고 좋은가.

사람이 생기고 나서 법이 생겼듯이 언어가 생기고 나서 문법이 생겼지만, 문법도 엄연히 법이다. 법은 공동체가 함께 지키자고 정한 것이다. 의미만 통하면 된다며 자꾸만 어법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의 말글살이 또한 끝없이 망가질 것이다. 그래서 ‘테스 형’도 악법인 줄 뻔히 알면서 독배를 마시지 않았던가.

테스 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원래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고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마당에 새겨져 있던 문구라고 한다. ‘악법도 법’이란 말 역시 테스 형이 말한 것처럼 와전됐지만, 사실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가 실정법주의를 주장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아고라의 철학자들에게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지만, 너희들은 너희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했던 테스 형. 형이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언어를 함부로 굴리는 우리를 향해 ‘너희 모국어를 알라’라고 일갈(一喝)할 것만 같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인 한글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잘 알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無知)를 크게 꾸짖을 것만 같다.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