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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금 세종, 금 왕조 안정 기조 구축한 명군

2020년 08월 04일(화) 00:00
<초당대총장>
금 세종(1123~1189)의 이름은 완안옹(完顔雍)으로 금나라 5대 황제다. 전임 황제 해릉왕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왕조의 안정 기조를 구축한 명군이다.

태조 아골타의 3남인 완안종보의 아들로 여진 이름은 오록(烏祿)이다. 12세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해릉왕과는 사촌 관계다. 해릉왕은 1149년 즉위한 후 수많은 종친과 중신을 처형했다. 완안옹은 현 요양에 해당하는 동경 유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자신도 살해될 것을 우려했다. 해릉왕은 동경 부유수로 고존복을 임명해 그를 염탐했다. 해릉왕은 남송 정벌을 최우선 과제로 정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부쳤다. 대남송 전쟁의 위험성을 간한 적모조차 살해하는 난행을 저질렀다. 생사 존망의 위기에 몰린 완안옹은 선수를 치기로 결심했다.

1161년 즉위하니 세종이다. 군대를 일으켜 금의 국도 연경에 입성했다. 해릉왕의 폭정에 시달린 종친, 중신 등이 적극 호응했음은 물론이다. 연호를 대정(大定)으로 개원하고 해릉왕의 수십가지 과오를 공개했다. 수백명의 중신과 종친을 이유없이 학살한 일, 상경(上京) 회릉부의 궁전을 파괴한 일, 백성들을 강제 징집한 일 등이 열거되었다. 해릉왕은 남송과의 전투 중 부관 완안원의가 주도한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세종은 남하한 군대를 철수시키고 남송과의 종전 협상에 나섰다. 세종은 우선 북방에서 거병한 거란족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강경하게 반란군 토벌에 나서는 한편 완안원의를 사자로 보내 설득 작업에 나섰다. 반란군의 일부는 서쪽의 서요로 탈출했고 나머지는 진압되었다. 세종은 주모자 외에는 처벌하지 않는 온건한 조치를 실시해 내란을 비교적 조기에 평정했다.

남송도 초대 황제인 고종이 황태자인 조신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되었다. 조신은 1162년 2대 황제 효종으로 즉위했다. 금에는 세종, 남송에는 효종이라는 유능한 군주가 등장하면서 양국의 화평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결국 1165년 송·금 화약이 체결되었다. 국경선은 기존의 화약대로 회하로 하고 종래의 군신 관계를 숙질 관계로 바꿨다. 세폐는 기존의 은 25만냥 비단 25만필에서 은 20만냥 비단 20만필로 약간 남송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206년 두 나라가 다시 싸우기까지 약 40년간 화평이 유지되었다.

송·금 화약 이후 세종은 내치에 전념하였다. 금은 대송 전쟁과 거란의 반란으로 엄청난 군비를 지출해야 했다.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곡물을 납부하면 관직을 주는 입속보관(入粟補官)제를 실시하였다. 승려에게 면허를 주는 도첩제(度牒制)를 시행하였다. 10년마다 민간의 재산을 조사해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도 도입하였다. 여진족 특유의 정신과 문화가 상실되는 것을 극력 경계하였다. 여진어와 여진문자를 쓸 것을 적극 장려하였는데 문화적으로 우월한 한족문화에 급속도로 동화되었다. 여진의 문화를 낮춰보는 문화적 사대주의가 심화되었다.

여진인은 분배된 땅을 제대로 경작하지 않아 토지를 상실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일하지 않고 사치에 빠지는 풍조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가난에 빠진 여진족을 구제하기 위한 조치를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은 땅, 한족이 경작하고 있는 국유지를 회수해 여진족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로 인해 한족의 반금(反金) 정서가 심해졌다. 거란족의 이반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세종은 거란족을 위무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거란족의 군사조직인 맹안모극을 폐지했다가 후일 다시 부활시켰다. 거란족과 여진족의 통혼(通婚)을 장려해 민족화합을 도모했다. 1177년 세종은 조칙을 내려 양 민족의 결혼을 적극 추진토록 하였다. 한편으로 다수의 거란족을 상경 등 북만주 땅에 강제 이주시켰다. 거란 관료의 수도 줄이고 거란 문자의 사용도 불허하였다. 기본적으로 수렵과 어업에 종사하는 정주형 여진족과 유목형 거란족 간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었다. 회유책과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세종의 고민이었다. 1189년 소요순시대(小堯舜時代)라 불리는 세종의 치세가 끝나고 손자인 장종이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