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242> 금 해릉왕, 금 4대 황제…쿠데타로 시해 당한 폭군

2020년 07월 28일(화) 00:00
<초당대총장>
해릉왕(海陵王, 1122~1161)의 이름은 완안량(完顔亮)으로 금나라 제4대 황제다. 황족과 조정 중신을 대거 처형하는 등 유례없는 전제 정치를 행했다. 남송 평정에 나섰다가 쿠데타로 시해당한 대표적인 폭군이다.

금 태조 아골타의 서장자인 요왕 종간의 차남이다. 3대 황제인 희종과는 사촌 관계다. 희종을 살해하고 제위에 올랐다. 희종은 정신이상과 과음으로 수많은 종친과 중신을 살해했다. 황비와 비빈도 죽이는 등의 난행 끝에 완안량이 이끄는 쿠데타로 살해당했다. 그는 직접 희종 시해 과정에 참여해 피가 흘러 온 몸이 피투성이였다고 한다.

해릉왕은 중화 문화에 익숙한 교양인이었다. 후진적인 여진 문화 보다 성숙된 중원 문화에 심취했다. 그러나 희종과 마찬가지로 전례가 드문 폭군이었다. 1149년 즉위 후 적극적인 한화 노선을 추구했다. 여진족 수장이 아니라 중원 국가의 황제가 되기를 열망했다. 즉위 직후 3가지 조칙을 발표했다. 국가의 대사를 본인이 직접 관장한다. 남송을 정벌해 그 죄를 묻는다. 천하절색의 미녀를 취한다. 세번째 조칙에서 해릉왕의 기이한 품성이 여실히 확인된다. 많은 종친을 죽이고 그 미망인과 딸을 취했다. 황음(黃淫)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상괘를 벗어났다. 상상을 초월한 학살을 계속했다. 1150년 한해에만 재상 종본, 종의 등 150명이 넘는 종친이 살해되었다.

1151년 중원 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한 천도 계획이 발표되었다. 현 하얼빈시 주변에 해당하는 상경 회령부에서 연경(현 베이징)으로의 천도였다. 국도인 연경의 정식 명칭은 중도(中都)였다. 과거 남북조시대 북중국을 지배한 북위의 효문제가 강력한 한화 정책을 위해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것을 연상시킨다. 중원을 다스리고 남송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국도 조성을 위해 동원된 백성에게 일인당 비단 1필을 주었다고 한다. 1153년 3월 중도로 천도했다.

천도 후 해릉왕의 주요 관심사는 황제권 강화 및 남송 정벌이었다. 여진족의 전통인 원로제와 합의제를 무시하고 황제 독재 권력을 확고히 했다. 황제권의 부자 승계를 당연시 하였다. 종친의 영향력을 차단키 위해 대규모로 종친, 황족을 살해하였다. 남송과의 일전은 불가피한 흐름이었다.

1142년 강화조약을 통해 회하를 경계로 양국의 국경이 정해졌다. 매년 은 25만냥, 비단 25만필을 남송으로부터 세공으로 받았다. 그러나 대남송 수입 초과로 항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였다. 선진적인 남송으로부터 차, 약재, 향료 등을 수입했는데 차의 수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컸다. 지리상 회하 이북에서 쌀 농사는 한계가 있었다. 한화 정책으로 여진족의 쌀 소비가 급증했다.

1155년 남송의 화평파 거두인 진회가 죽었다. 대남송 작전 지휘를 위해 개봉을 남경으로 부르며 도시 조성에 나섰다. 1159년 남송 토벌의 조서를 내렸다. 맹안모극에서 20~50세 장정을 모두 군적에 포함시켰다. 약 60만필의 말을 징발했다. 1161년 6월 남경에 입성했다.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한 까닭에 거란족 등 북방 유목민 세력이 궐기했다. 그러나 해릉왕에게는 마이동풍격이었다. 서경 유수인 소외충을 거란 토벌에 보냈지만 평정에 실패했다. 배후를 튼튼히 할 목적으로 금에 억류한 요나라와 북송의 왕족을 대거 처형했다. 부친인 종간의 정처가 남정을 간하자 살해했다. 시녀 수십여명도 몰살했다. 군사의 사기는 형편없었다. 대열을 이탈해 달아나는 군인이 부지기수였다.

해릉왕의 종제인 왕안옹이 동경에서 세종으로 즉위했다. 살해 당하기 전에 먼저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이 사실을 들은 해릉왕은 장강 도하작전을 계속했다. 안휘성 동부인 화주까지 진군했으나 도강에는 실패했다. 남송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도강을 서둘러 “3일만에 도강 못하면 모두 죽인다”고 장수들을 협박했다. 참다 못한 장수들이 해릉왕을 살해했다. 측근인 완안원의가 쿠데타를 주도했다. 죽은 후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해릉왕 살해 후 금군은 철수했다. 세종은 남송과의 화의를 도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