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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니?
2020년 07월 24일(금) 00:00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갱년기라고 혼자 멋대로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제법 시간이 흐른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은 일단 열정의 부재였다. 열정이 왜 사라졌는지,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는지, 그리고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뭐하나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부재’라는 무미건조하고 몰가치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열정의 부재를 확인한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아니면 어떻게든 살아 내고 싶은 뜨거운 욕망이었을까?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욕망이 시키는 대로 잘 살았다. 먹고 싶은 거 먹고, 보고 싶은 거 보고, 하고 싶은 거 하며 크게 아쉬울 것 없이 말이다. 그런 까닭에 열정의 원천을 욕망이라고 하기엔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석연찮은 구석이 여전히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욕망의 부재가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이유, 삶의 이유, 그러니까 인생 목표의 부재였다. ‘과연 살아갈 이유도 없이 어떻게 살까?’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런 거 없어도 사는데 아무런 문제없다. 단언컨대 삶의 목표는 인생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애초에 태어난 이유가 없으니 살아야 할 목표도 없다. 매우 단순명쾌하다.

원칙도 없고 구체적인 목표도 없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것은 생존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다. 그것은 생존 본능을 이런저런 논리로 포장하여 그럴싸한 삶의 이유, 삶의 의지라고 대외적으로 천명한다. 반면 원칙이나 궁극적인 목표 없이 구체적인 목표만 있는 삶은 마치 인생을 100미터 달리기 시합하듯 사는 것과 같다. 몇 번은 가능하지만 지속성이 없다. 지속성이 없는 구체적인 목표는 그 공허함 때문에 결국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곁에 슬그머니 다가온 ‘소확행’도 있다. ‘욜로’(YOLO)가 발전한 형태인 소확행은 삶의 기쁨을 지금 이 순간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서 찾는 것이다. 이를테면 갓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된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 같은 것이다. 소확행의 세계에서 목표를 이루겠다는 의지나 계획 따위는 필요 없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품위마저도 박탈당한 자에게 소확행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반대로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며 살아가는 성공한 현대인에게도 역시 소확행은 무의미하다. 소확행의 길을 가는 순간 성공한 현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사리지고 만다. 소확행을 선택하려면 지금껏 누리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확행은 희망이 실종된 삶에 대한 자기 합리화이다.

목표 따위는 없어도 살 수 있다. 다만 우울과 흥분, 체념과 기대, 분노와 무력감, 자책과 원망, 쾌락과 공허함을 오가는 삶을 기꺼이 수용하기만 하면 된다. 궁극적인 삶의 목표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부처님의 역할이 지대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은 일상적인 학살이 자행되는 유태인수용소에서도 삶의 이유가 분명한 사람은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수행자 싯다르타는 삶의 이유가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지향할 때 비로소 삶이 야기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였다.

삶은 우리의 믿음보다 훨씬 더 취약한 대지 위에 서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 특별한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은 삶과 전혀 다른 결이 아니라, 삶의 한 장면에 불과하다. 죽는다는 것은 살면서 겪는 자질구레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인연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은 삶에 대한 막연한 고정 관념, 말하자면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든든함을 무력화시킨다. 대신 그 자리를 삶을 향한 진솔한 애정으로 채운다. 아니, 애정이라기보다 초라한 삶의 실상을 마주하며 느끼는 연민에 가깝다.

까뮈가 ‘느낀’ 삶의 부조리가 이런 것일까?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삶에 대한 연민 때문일까? 삶의 목표는 없고 살아야 할 이유 역시 없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찾고 또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삶에게 내가 주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