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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금 희종, 금나라 3대 황제…남송과 강화조약
2020년 07월 21일(화) 00:00
<초당대총장>
희종(熙宗, 1119~1150) 완안단(完顔亶)은 금나라의 3대 황제(재위 1135~1149)다. 하북에 세운 괴뢰국가 제(齊)를 폐하고 직접 통치에 나섰으며 남송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말년에 과음으로 정신박약 상태에 빠져 정치가 문란해졌다.

금 태조 아골타의 차남 종준의 아들로 2대 황제 태종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았다. 태종은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여진 원로들의 압력으로 1132년 완안단을 후계자로 정했다. 1135년 태종이 죽자 제위에 올랐다. 금 왕조 실력자인 종한과 종간은 태종의 아들 종반보다 나어린 희종이 훨씬 다루기 쉬운 인물이었다. 종간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키로 하고 종한을 태보령삼성사로 임명했다. 황제의 스승 자격이었지만 실권은 약화되었다. 황제 곁에 있어야 되므로 지역기반인 서경을 떠나야 했다. 실의 속에 1137년 종한이 죽었다. 정강지변으로 북송이 멸망하자 금나라는 하북지방에 제라는 괴뢰정권을 수립해 간접통치에 나섰다. 금군을 지휘한 달란은 제남부 지사 유예를 발탁해 하남의 민정을 맡겼다. 유예는 당초 금의 남하를 우려해 좀 더 남쪽지방의 책임자로 전출해 줄 것을 희망했지만 남송의 고종이 허락치 않아 불만이 많았다. 유예는 적극적으로 금에 협조했다. 개봉을 함락시킨 맹장 종한은 태종의 허가를 받아 유예를 1130년 대제황제(大齊皇帝)로 책립하였다.

실력자 종한이 죽자 대제황제 유예의 입장이 약화되었다. 달란과 종반이 힘을 합쳐 제나라 폐위를 주장했다. 유예는 무능하다는 주장이었다. 제나라 폐지는 금의 권력 강화로 이어졌다. 하남에 제를 세워 북송 주민들이 금의 지배를 기정사실로 여겼다. 유예는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 싶었지만 희종은 그대의 아들이 덕망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유예는 촉왕으로 봉해졌고 내몽고 임황부로 옮겨져 1143년 죽었다. 이로써 금은 북중국의 지배자 지위를 굳건히 하였다.

송과의 경쟁이 가속화되었다. 여러번 남송 토벌에 나서지만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강남은 수로가 많아 기병 위주의 금군으로서는 힘든 싸움이었다. 전선이 길어져 보급에도 애로가 많았다. 물을 싫어해 여진족의 용맹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화평파인 진회가 남송의 재상이 된 것도 양국이 강화조약을 맺기에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1137년 정월 금나라로 납치된 휘종이 죽었다. 남송의 고종은 생모 위씨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고 휘종 유해와 위씨의 송환을 위해 대금 화의를 결심하였다. 화평파 거두인 진회가 추밀사로서 본격적인 협상에 나섰다.

1139년 화의가 성립되었다. 남송은 금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고 매년 세폐로 은 25만냥, 비단 25만필을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금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지만 잃어버린 하남과 섬서의 땅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실리를 선택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금나라 조정 내부의 갈등으로 이 화의는 파기되었다. 희종과 종간은 달란, 종반의 화의파를 숙청하였다. 남송은 돌려받은 하남과 섬서를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1140년 종필이 총사령관이 되어 재차 남침했다. 악비, 한세충, 장준 등의 활약으로 금의 침입을 막아냈다. 1141년 8월 금의 실력자 종간이 죽었다. 남송과의 싸움에 지친 금도 화의를 희망했다. 진회는 대금 강경파인 악비를 역모로 몰아 죽였다. 악비의 죽음으로 남송은 주전론을 누를 수 있었다. 1142년 다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회하를 경계로 하고 세폐는 전과 같았다. 그러나 개봉과 장안이 금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휘종의 유해와 고종의 생모 위씨가 돌아왔다.

중원의 패자가 된 휘종이 정신이상자가 되어 황족과 종친을 숙청하였다. 과음으로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남에서 온 우문허중, 고사담 등의 문인을 죽였다. 호부상서 종례, 전각, 해의 등 중신을 취중에 죽였다. 1149년에는 황후와 비빈을 거침없이 죽였다. 재상인 평장정사 완안당은 희종의 사촌인데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희종을 죽이고 즉위했다. 4대 황제 해릉왕이다. 중국 사상 보기 드문 폭군의 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