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총·공포…무서워 밖에 못 나가는데 나라는 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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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총·공포…무서워 밖에 못 나가는데 나라는 뭐하나”
주부·학생 등 14명의 일기장으로 본 5·18
주이택씨 “계엄군 시위대 진압 개·돼지 때려 죽이는 것 같다”
주소연씨 “광주사태 170명 사망 신문 기사 모조리 거짓말”
문용동씨 “광주사태, 공수부대 만행 분노한 시민 궐기 증언해야”
장식씨 광주시내 탱크·군인·장갑차 위치 그린 약도 고스란히
2020년 05월 18일(월) 00:00
광주여고생 주소연씨가 광주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언론을 비판한 글.
40년 전 광주의 오월을 글로 써 내려간 14명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1980년 광주의 처참한 상황을 느끼고 겪은 그대로 기록한 ‘오월일기’로 남겼다.

‘일기(日記)’는 개인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경험·생각·감상 등을 하루 단위로 기록하는 비공식적인 사적 기록이다. 40년전 광주 옛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했던 여대생을 비롯해 당시 초등학생·고등학생·주부였던 이들은 주워진 상황에서 각자의 시선과 방식으로 광주의 오월 그날을 일기로 남겼다. 14편의 글은 5·18과 관련해 대단한 새로운 사실을 내놓지는 않고 있지만, 1980년 당시 광주에서 생활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느끼는 고통, 분노, 불안 등과 무자비한 국가 폭력에 대한 공포가 담겨 있다.



◇주이택씨 일기=‘광주시내는 공수부대 특전단이라는 무자비한 살인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중상을 당했습니다.’(5월18일) 1980년 당시 천주교 광주대교구 직원으로 일했던 주씨는 이날 공수부대특전단이 젊은 사람들을 몽둥이와 칼로 때리고 찌르면서 집압에 나섰다며 비명과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렸다고 적어놓았다. 주씨는 하루뒤인 19일의 일기에도 ‘군인들이 살육작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1, 2명씩…. 나중에는 무더기로 젊은이들과 학생들을 잡아왔다’면서 당시 광주 금남로 가톨릭센터 6층에서 지켜본 계엄군의 시위대 진압장면을 ‘인간이 아니라 개나 돼지를 때려죽이는 것 같다’고 썼다.

22일에 ‘도청쪽으로 가다가 그들(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져 길려 오는 응급환자를 전대병원 응급실에서 보았습니다’면서 ‘국민학생 6학년 쯤 되어보이는 어린이와 중학교 3년쯤 되는 학생은 배와 머리에 각각 총탄을 맞고 이미 숨져 있어서 의사의 지시를 받고 영안실에 안치시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주씨는 적어놓았다.

◇주소연씨 일기=당시 광주여고 3학년이었던 주소연씨는 날마다 신문을 스크랩 하면서 당시 광주에서 진실과 비교하며 기록을 남겼다.

주씨는 6월 1일자 조선일보 ‘광주사태로 170명사망, 계엄사 발표’라는 신문기사를 스크랩하고 이에 대해 ‘모조리 거짓말’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에서 조씨는 ‘차라리 사망자 수에 0을 붙인수가 맞는수’라면서 ‘거짓말도 유분수지. 도청앞에 죽어있는 사람만도 100명이 넘었는데 외각지대에서 죽은사람과 병원에 죽어잇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란말인가’라고 남겼다.

◇강서옥씨 일기=‘주여 우리 불쌍한 광주 시민을 보호해 주소서. 주여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소서. 내 남편과 내 아들 딸들을 도와주시고, 우리 사촌 특히 석운이를 보호하고 조와주옵소서’(5월 20일)

5·18 당시 목포에 살던 주부 강서옥씨는 서울로 이동하면서 가족과 지인 등 주변으로부터 전해들은 광주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19일 강씨는 ‘광주에 전화를 했더니 난리라고 한다. 학생들이 죽어서 시체가 궁글러 다닌다는 소식이다’며 ‘사지가 떨리고 안절부절 어떻게 안정이 안된다’고 당시 강씨가 느낀 심정을 일기에 적었다.

◇김송덕씨 일기=‘변두리인 우리집 주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포와 총을 계속 쏘아서 시민의 출입을 못하게 하고 있다.’(5월23일)

21일 계엄군이 퇴각해 광주시 외곽지역에 주둔하자 주남마을 근처인 지원동에 살고 있던 김송덕씨가 느낀 공포와 불안감이 이 일기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27일에 김씨는 ‘오늘 아침6시까지만 해도 총성이 빗발쳐 다시 작전이 시작되는 구나 하고 요란한 굉음소리를 내며 하늘을 나르는 비행기와 총소리에 숨소리 마저 죽여가며 오늘에 처한 우리들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겨보기도 했다’면서 ‘밤이되자 위험한 변두리 지역인 화순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집이라 마음을 놀 수가 없었는데 통금 시간이 약간 넘어서 다시 따발총소리가 한차례 울렸다’고 적었다.

동산국민학교 6학년이던 김현경씨가 느낀 당시의 공포를 그대로 적은 일기.


◇김현경씨 일기=당시 동산초등학교 6학년생이던 김현경씨는 1980년 5월18일부터 21일까지 무서움, 공포, 무섭다, 총이라는 제목으로 일기를 썼다.

김씨는 19일 ‘젊은 언니 오빠들을 잡아서 때린다는 말을 듣고 공수부대 아저씨들이 잔인한 것 같다’, 20일 ‘광주시가 왜 참혹하게 됐는지 무섭고 두렵기만 하다’, 21일 ‘나라에서는 무엇을 하는지, 이 비참한 사건을 아는지, 왜 수습을 안 해주나, 무서워서 밖에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문용동씨 일기=1980년 5월 27일 옛전남도청에서 숨진 문용동씨가 남긴 일기도 있다. 문씨는 22일자 일기에 ‘우린 후세에 전 국민에게 광주사태가 몇몇의 불순세력에세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선량한 시민들의 궐기임을 알리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적어 40년의 지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을 기록해 뒀다.

◇이춘례씨 일기=‘분에 못이겨 몇자 적어야 겠다. 연 이틀째 사람이 개새끼처럼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온시내바닥이 죽음의 거리로 변하고 있다’(5월19일). 당시 전남대생이었던 이춘례씨는 1980년 5월18일 이전 대학생들의 횃불시위에 참가 했으나 5·18기간 동안 참여 할수 없는 심정을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겼다.

20일 일기에는 ‘개죽음, 칼로 임산부를 찔러 죽이고 시내버스에 탄 젊은 학생들을 내리게 해서 질질 밟아버리고 여학생들은 옷을 벗겨 모욕을 주고’라면서 ‘얼어붙어 버린 나자신 도저히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라며 적으며 자신을 탓했다.

◇조한유씨 일기=당시 광주우체국 통신과장으로 근무했던 조한유씨는 금남로에서 대학생 3명과 나눈 대화를 일기장에 남겼다. 22일 일기를 보면 조씨는 대학생들에게 ‘자네들은 총기를 반납하고 귀가하는게 좋을 것 같다’고 권유를 하지만 대학생들은 ‘이제 물러나는 것도 희생의 값이 없지 않습니까? 저희들은 젊지 않습니까? 한몸 희생하는 것까지도 각오는해야 하지요’라는 대답을 듣고 ‘대단한 비장의 결의가 그들에겐 서있다’라고 남겼다.

◇조한금씨 일기=조한유씨의 동생인 조한금씨도 목포에서 직접 겪고 들은 광주의 5·18 전개과정을 일기장에 기록했다. 21일 조씨는 일기장에 ‘광주의 일이 궁금해 전화를 하려 했더니 불통이었다’면서 ‘교통도 두절이서…. 시민의 발과 귀와 입을 모조리 막아 놓고 고립돼보라는 위협인것 같다’라며 광주 밖에서 광주의 상황을 적었다.

◇민영량씨 일기=‘전대생 500여명이 계엄철폐,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박차고 나오려는데 공수부대의 무차별 대검으로 배·옆구리·머리 등 닥치는 대로 난자질을 해서…’(5월18일)

도청과 인접한 동명동에 거주한 시민 민영량씨는 당시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고 5·18을 기록으로 남겨야한다는 사명감으로 일기를 작성했다. 민씨는 25일자에 ‘외국기자 30여명이 광주에 왔단다’면서 ‘국제적망신이지만 광주의 만행이 그대로 외국에 보도가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소망도 일기에 남겼다.

◇박연철씨 일기=평소 일기를 써오던 직장인 박연철씨도 평소 5·18시기에 참상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일념에 일기를 남겼다. 박씨가 남긴 21일 일기에는 ‘모두들 나와서 차량에 올라타 행진하는 이들에게 환호갈채하고 물을 떠주면 먹을것 마실것을 건네준다’며 당시 광주의 모습이 담겨있다. 22일에는 ‘전대병원에 18명 사망, 적십자병원, 기독병원 등에 산재한 사상자들의 수는 합하여 사망자가 57명, 부상자가 409명’이라는 박씨가 들은 사상자 발표 내용도 적혀 있다.

◇허경덕씨 일기=조한유씨의 아내로 당시 하숙집을 운영하던 허경덕씨는 광주 상황을 메모 형태로 기록해 놓았다. 이 때문에 정확한 날짜는 적혀있지 않고 1980년 5월이라고만 적혀있다. 허씨는 ‘모든 통신망은 불통이고 흉흉한 소식만 무성하다’, ‘지나가던 사람도 죽고 장사하던 사람도 죽고 차타고 일가족이 지나가다 죽고 부상당하고 왜인지 도무지 알길이 없다’는 내용의 메모를 남겼다.

◇김윤희씨 일기=‘하나의 총알이 주방 유리창을 뚫고 맞은편 벽에 꽂혔다.….난데없이 등에 뭐가 꽉 박히며 코와 입으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아침 6시 30분경)’ 1980년 5월 당시 전남대 2학년생 김윤희씨는 40년 전인 1980년 5월 27일,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 때 본인이 경험한 내용을 일기장에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계엄군의 총알에 맞는 순간 당시 김씨는 ‘아 맞았구나. 하지만 난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내용까지 일기에 적었다.

서석고 3년생인 장식씨가 광주의 실상을 전국에 알리는 형식으로 쓴 글.


◇장식씨 일기=서석고 3학연 이었던 장식씨는 일기장에 1980년 5월 31일 광주시내에 위치한 탱크·군인·장갑차 위치를 직접 손으로 그려넣은 약도와 5·18당시 상황을 언론에 알리기 위한 호소문도 적어놓았다. ‘5월 26일 광주은행 본점 앞으로 오니 총성나고 있었고 마이크를 들고 있던 대학생이 왼팔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썼고 또 ‘목에서 피가 난 사람도 있었고 군인들이 총을 쏜 것 같다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로 후방에서 총성이 들려 겁이 나 달려 목으로 빠져 나왔다’고 적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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