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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정이, 송나라 도학 대표 인물…정주학 창시자

2020년 04월 07일(화) 00:00
<초당대총장>
정이(1033~1107)의 자는 정숙 호는 이천(伊川)으로 허난성 뤄양 사람이다. 형 정호와 함께 송나라 도학을 대표한다. 형과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불리며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다.

송사에 따르면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그 학문도 성(誠)에 근본을 두고 사서(四書)를 표방하고 육경에 통달했다고 한다. 형과 함께 주돈이에게 사사했다. 구법당 계열로 철종 초 사마광, 여공저의 추천으로 국자감 교수가 되었고 비서성 교서랑, 숭정전설서로 기용되었다. 낙촉(落蜀)의 당쟁에 연류되어 쓰촨성 푸저우로 유배되기도 했다. 휘종때 복관되어 중앙에 복귀했다.

정이천은 이학(理學) 일파의 선구자다. 펑유란의 해석에 따르면 정이천은 ‘리는 영원하며 증가할 수도 소멸할 수도 없다’고 보았다. “하늘의 이치라고 하는 것은 생겼다가 없어지고 증가했다가 감소하는 것을 상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그것에 관하여 알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천은 수양 방법으로 궁리(窮理)를 중시했다. 수양하려면 경(敬)을 배워야 하고 학문의 정진은 지식 추구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경건하면 자연히 허정(虛靜)해진다. 수양함에 있어 우리는 늘 삼가(敬)해야 한다. 이후 경건함은 신유가의 핵심적 용어가 되었다. 오늘 한 사물을 탐구하고 내일 또 한 사물을 탐구하면 ‘저절로 관통하는 경지’가 생길 수 있고 우리 마음 전체를 시원스럽게 깨달을 수 있다. 리를 궁리하면(窮理) 성을 다 발휘하고(盡性) 성을 다 발휘하면 곧 천명에 이르게 된다(至命).

1085년 철종이 즉위하자 사마광, 여공저, 한강은 정이의 의로운 행실을 추천했다. 사마광과 여공저는 추천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정이는 옛 것을 좋아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빈한하지만 절의를 지키고 충신에 따르는 언행을 하고 있으며 예의에 맞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이가 50이 넘었지만 출세를 구하지 않으니 진실로 유자라 하겠습니다. 삼가 폐하께서 파격적으로 발탁해 선비에게 모범으로 삼으십시오.”

조정에서 강의할 때에는 자세를 엄격히 하였다. 누군가 이를 보고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한미한 신분으로 시강직(侍講職)을 맡았으니 또한 자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는 철종이 치질에 걸려 며칠동안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선생은 물러나와 재상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일어나지도 못하시는 상태인데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었습니다.” 선생이 말하기를 “황제가 병들어 계신데 재상이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재상은 다음날 상주를 올려 병세를 물었다. 이일로 인해 조정 중신들이 대부분 그를 싫어하게 되었다. 간의대부 공문중이 선생을 다음과 같이 탄핵했다. “그는 간사하고 아첨만을 일삼을 뿐 평소 겸손하지도 않습니다. 시정에서는 그를 오괴의 우두머리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 국법의 엄중함을 보여주십시오.” 결국 서경국자감으로 좌천되었다.

언제가 형인 정명도가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후 사도(師道)를 존엄하게 할 수 있는 인물은 나의 동생일 것이다. 만일 후학들을 이끌며 그 재주에 따라 학문을 이룰 수 있게 이끈다면 내 아무런 아쉬움이 없겠다.”

유정부와 양중립이 선생을 찾아뵈었다. 그런데 어느날 선생이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어 두 사람이 서있은채 감히 갈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선생이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는가? 날이 저물었으니 이제 돌아가게나” 두 사람이 물러나와 바깥을 보니 눈이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내렸다. 성격의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말년에는 후학들을 좀 더 부드럽게 대했다. 학문이 이미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유는 이정 형제를 초대해 서호(西湖)로 유람을 갔다. 동행한 제자들 중 말을 함부로 하고 옷차림이 흐트러진 자가 있었다. 이천 선생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희는 어른들을 모시고 가는데 어찌 감히 웃으며 떠드느냐. 한씨 가문의 근직한 가풍이 이제 무너졌구나” 한씨는 그들을 모두 돌려보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