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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포증, 염라대왕 별칭…북송 대표 청백리
2020년 01월 21일(화) 00:00
<초당대총장>
포증(包拯, 999~1062)의 호는 청천(靑天)으로 안휘성 여주 합비 사람이다. 북송의 대표적인 청백리다.

포원외의 3남으로 태어났다. 두 형이 20세 이상 연상이라 모친이 이를 부끄러워해 낙태하려 했지만 태몽을 꾸고 그만두었다. 얼굴이 검었으며 어려서부터 효자로 유명했다. 인종 천성 5년(1027) 진사시험에 합격해 요동성 건창현 지현 등을 지냈으나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했다. 부모의 3년상을 마친 뒤 1037년 관직에 복귀해 천장현 지현, 지단주사를 거쳐 감찰어사로 발탁되었다. 이후 지간원으로 재직했다. 이때 장귀비의 인척 장요좌를 탄핵했다. 1057년 개봉부 지부로 부임해 대대적으로 탐관오리를 숙정했다. 1061년 추밀원부사가 되었고 다음해 병사했다. 인종은 동해군개국후에 추봉하고 이부상서로 추증했다. 시호는 효숙(孝肅)이다.

청천이라는 호가 시사하듯이 그는 청백리의 상징이었다. 재물에 미혹되지 않고 권세를 탐하지 않은채 사직과 백성을 위해 헌신한 공직자였다. 그가 활약한 인종 시대는 북송의 전성기였지만 부정부패가 심화되고 서하, 요에 대한 대규모 세폐 지급으로 재정이 어려움에 빠졌다. 포증은 “백성을 보살피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신조로 공정하고 엄격한 법집행을 관리의 가장 큰 책무로 인식했다. 법치주의가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 황제와 조정 중신들의 솔선수범을 강조했다. 또한 백성들이 억울하게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그가 사형제도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사형수에 관한 기록을 철저히 살펴 판결에 문제가 있는 경우 황제에게 직보해 자신이 직접 심문에 나섰다.

인종의 총애를 받는 장귀비의 집안 어른인 장요좌에 대한 처벌은 공평무사한 법집행의 단적인 예다. 장요좌는 3사의 요직을 차지해 뇌물을 수수하고 공금을 유용하였다. 포증의 탄핵으로 삼사에서 물러났지만 다른 직책을 계속 유지했다. 포증의 4번에 걸친 탄핵으로 결국 모든 직책을 내놓았다.

그가 강소성 천장현령으로 재직할 때 일이다. 도둑이 소의 혀를 잘라갔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그는 돌아가 그 소를 도살해 팔라고 했다. 얼마 후 사사로이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남의 집 소의 혀를 잘랐다가, 이제 또 그 집에서 소를 잡았다고 고발하느냐?” 그 도둑이 놀라 죄를 자백하였다.

벼루의 명산지인 단주의 지주 때 일화다. 매년 중앙에 벼루를 공물로 바쳤는데 전임 지주는 많은 벼루를 고관들에게 뇌물로 보냈다. 그는 벼루 생산업자에게 명해 공납의 수량만큼만 내도록 했다. 임기가 만료되어 전근할 때 단 하나의 벼루도 지니지 않은 채 떠났다.

언관(言官)으로 재직중에는 국가 현안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을 밝혔다. 개봉부 지부가 되어서는 철저히 중앙의 명령을 집행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를 ‘포대제(包待制)’ 혹은 ‘포가(包家)’라 부른다.

고향인 합비의 지주로 재직할 때는 외당숙이 죄를 범하자 용서없이 태형을 가했다. 개봉부 지부 시절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청탁이 통하지 않는 염라대왕과 같은 포증 나리”라 불렀다. 모든 공직자와 백성들이 존경하며 복종하였고 원근 각지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상관이나 동료와 논의중에는 거침없이 상대방에게 면박을 주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주장이 이치에 부합하면 기꺼이 수용했다.

포증은 천성이 엄해 일찍이 웃는 모습을 보인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비유해 황하(黃河)가 깨끗해지는 것에 견주곤 하였다. 그의 글에 “깨끗한 마음은 다스림의 근본이고, 곧은 길은 이 몸이 나아갈 바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런 점에서 명말의 청백리 해서와 비교되곤 한다. 해서는 33년 공직생활을 했는데 죽은뒤 남긴 재산이 은자 100냥에 불과했다. ‘지부 3년이면 은 10만냥’이 당시의 관행이었다. 합비의 포공 사당에는 우물이 있다. 청렴의 상징으로 염천(廉泉)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탐관오리가 이 우물을 마시면 심한 복통을 일으키고 청백리가 마시면 아무 탈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