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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왕소, 재상 부친 대이은 북송 인종 때 명신
2020년 01월 07일(화) 00:00
<초당대총장>
왕소(王素, 1071~1073)의 자는 중의(仲義)이며 현 산동성 요성시에 해당하는 신현 출신이다. 북송초 재상을 지낸 왕단의 아들로 인종 때 주로 활약했다.

천성 5년(1027) 관직에 나아가 안휘성 영주, 하남성 회주의 통판을 지냈다. 이후 상서둔전중외랑으로 산동성 복주의 지주가 되었다. 어사중승 공도보 추천으로 시어사가 되었으나 공도보가 좌천되자 호북성 악주 지주로 좌천되었다. 악주에서 인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경력 2년(1042) 개병부원외랑, 지간원, 동판국자감에 제수되었다. 인종이 대신들에게 정치개혁에 관해 하문하자 10 여가지를 상소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였다. 3품의 관직을 내리고 천장각대제, 회남전운안찰사로 승진시켰다. 종전의 안찰사들은 가혹했지만 그는 정도를 지켰다. 탐관오리에 대해서는 엄히 책임을 추궁해 부하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감숙성 위주, 섬서성 화주의 지주를 역임했고 중앙에 복귀해 병부랑중이 되었다. 이어 인사를 담당하는 기구인 삼배원의 업무를 담당했다. 사천성 성도부의 지주를 역임했는데 화폐인 철전(鐵錢)이 대량 주조되어,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오르는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이에 향후 10년간 철전을 주조하지 못하게 하는 명령을 내려 위기에 대처했다. 사천성 광원에 기근이 들자 관부의 창고를 열어 이재민을 구휼하였다. 인종이 구휼에 관한 조서를 내리기 전에 왕소의 상소가 조정에 도착하자 크게 칭찬하였다. 왕소가 베풀은 선정으로 촉 사람들은 그는 왕공이단(王公異斷)이라고 일컬었다. 이후 지개봉부로 복직되었다.

삼공(三公)의 자제들이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는 것을 혐오해서 번잡한 공무를 점차 멀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도둑이 늘어나자 어사의 탄핵을 받아 허주의 지주로 좌천되었다. 치평 원년(1064) 서하(西夏)가 서쪽 변경을 침입했다. 그는 단명전학사로 제수되어 재차 위주 지주로 부임하였다. 서하 군대가 부임 소식을 듣자 포위를 풀고 회군하였다. 군대를 잘 통솔해 서하인들이 두려워하였다. 강족(羌族) 사람들이 땅을 바치고 복속을 요청했다. 하루는 장수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데 적이 쳐들어와 변방의 백성들이 놀라 성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긴급보고가 들어왔다. 장수들이 간사한 무리들을 입성시키면 반드시 내응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들의 입성을 막으면 동쪽으로 가 관중이 반드시 소란스러워 질 것이다. 내가 이곳에 있어 감히 나를 침범치 못할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 잠시 후 척후병이 잘못된 정보라고 보고했다. 장수들이 모두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신종 희녕초 단명전학사로 태원부 지주가 되었다. 산서성은 매년 흉년이 들어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다. 부자들에게 식량을 기부토록 해 10만여 명의 이재민을 구제하였다. 백성들이 은혜에 감복해 그가 이직하자 말을 가로막아 종일토록 나갈 수가 없었다. 경사로 들어가 지통진, 은대사를 거쳐 공부상서로 재직 중 1073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종은 하루동안 조회를 파하고 의민(懿民)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경력신정이 실패해 범중엄, 부필, 한기 등이 관직에서 쫓겨나자 대신들이 두려워 아무 말도 못했다. 오직 그만이 홀로 “부필, 한기, 범중엄이 모두 신망이 두터우니 당연히 다시 불러 기용해야 합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종 앞에서 부필을 칭찬하였다. 부필이 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왕소가 상당한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필이 재상이 되자 지개봉부에 있던 자신을 요직에 기용해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뜻이 관철되지 못하자 부필을 헐뜯었다.

왕덕용이 후궁 두 명을 인종에게 올리자 그가 간언했다. 인종이 말하기를 “짐은 진종의 아들이고 경은 왕단의 아들이니 우의로 따지자면 다른 사람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왕덕용이 두 여자를 올려 이미 짐을 좌우에서 섬기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왕소가 말하기를 “나의 근심은 좌우에서 모시는 데 있습니다.” 인종이 얼굴빛을 고쳐 3백관씩 주고 두 여자를 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