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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힘’을 믿는다면
2019년 12월 04일(수) 04:50
<제작국장·문화선임기자>
지난 2013년 서울 삼청동에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하 서울관)은 미술계의 ‘20년 숙원’이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큰 맘 먹지 않으면 선뜻 나서기가 꺼려질 만큼 접근성이 떨어진 탓이다.

그렇다고 서울관이 ‘꽃길’만 걸은 건 아니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복궁이 자리하고 있는 데다 옛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등록문화재이다 보니 각종 규제들로 건립에 차질을 빚었다. 특히 미술관 부지로 낙점된 옛 기무사 터가 발목을 잡았다. 당시 이 곳에는 지상 3층의 본관 이외에 강당, 연병장 등 건물 10여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미술계가 총 2만7402㎡에 달하는 이 일대를 ‘한국의 빌바오’로 조성하자며 철거를 요구하자 시민단체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유인 즉슨, 원형보존을 통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건물들을 존치하면 미술계의 ‘청사진’은 틀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술인들의 우려는 기우로 끝났다. 시민단체들이 ‘서울관 프로젝트’의 큰 틀을 깨지 않기 위해 근대문화재인 본관만 원형을 살리는 통큰 결정을 한 것이다. 이들은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위해 나머지 부속건물을 없애는 대신 문화콘텐츠를 활용해 장소가 지닌 역사성을 ‘기억’하는 차선책을 택했다. 예술의 힘으로 역사의 기억을 공유하기로 한 것이다. 설계를 맡은 민현준 건축가는 여러 개의 섬이 떠 있는 듯한 군도(群島)형 미술관으로 풀어내 미술관의 문턱을 낮췄다. 덕분에 시민들은 미술관 방문을 연례행사가 아닌 일상의 마실로 여기게 됐다.

지난해 12월 14일 저녁,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미디어 월(옛 전남도청, 현 민주평화교류원)에 내걸린 5·18 항쟁 무명열사 50명의 영정사진 위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 잔잔히 울려 퍼졌다. 미디어 아티스트 정지영씨의 퍼포먼스 ‘Licht-빛’이다. 이날 팔순의 김길자씨는 80년 ‘그날’ 세상을 떠난 고 1 아들 문재학군을 떠올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관람객들의 가슴에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정 작가는 “5·18의 마지막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과 미디어 월은 ‘동전의 앞 뒤’처럼 한몸인 만큼 5월정신이 미디어 아트의 영롱한 빛처럼 오래 기억되기 바란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시아문화전당의 랜드마크 기능을 담당해온 미디어 월이 철거될 운명을 맞게 됐다. 최근 발표된 옛 전남도청 복원계획에 따르면 지난 2017년 26억 원을 들여 건립된 미디어 월은 도청건물을 가린다는 이유로 복원 공사가 끝나는 오는 2022년 사라지게 된다. 이를 두고 문화계에선 옛 전남도청과 문화전당을 ‘이어주는’ 미디어 월의 의미를 무시한 근시안적인 결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디어 월이 지닌 예술적 활용가치에 대한 고려 없이 ‘과거’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가로 75m, 세로 16m 규모의 미디어 월은 국내 최초의 멀티미디어 플랫폼으로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인 광주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때로 기억은 눈에 ‘보이는 것’ 보다 강렬하다. 예술이 전하는 기억의 힘은 유적 못지 않다. 미디어 월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