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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인종 북송 4대 황제…왕조 전성기 구가
2019년 12월 03일(화) 04:50
초당대총장
인종(仁宗, 1010~1063)의 이름은 조정으로 북송의 4대 황제다. 중앙집권 체제가 안정되는 등 북송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진종의 여섯째 아들로 후궁 이씨 소생이다. 그의 생모가 꿈에 신선이 하늘로부터 하강하자 진종이 그대가 내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종의 정실인 유황후는 애를 낳을 수 없자 그를 자신의 아들로 키웠다. 1022년 13세로 황제에 즉위했다. 성년이 될 때까지 자신의 출생 사실을 몰랐다. 유황후가 황태후 자격으로 수렴청정에 나섰다. 명도 2년(1033) 유태후가 죽자 친정에 나섰다. 생모가 죽은 사실을 알고 비통해했다. 평소 작은 어머니로 모신 양태후로부터 출생의 비밀을 들었다. 생모에게 황후에 버금가는 명예를 주기 위해 봉자묘를 조성해 유태후와 이씨의 위패를 함께 세웠다.

서하(西夏)와의 갈등이 심해졌다. 1041년 서하군이 침략해 호수천에서 양국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송군의 피해가 커 전사자가 1만명을 넘었다. 2년여간 전쟁으로 군대와 재물의 피해가 커 1044년 서하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송은 서하가 신하가 되는 조건으로 매년 막대한 물자를 제공했다. 비단 13만필, 은 5만냥, 차 2만근을 보냈다. 범중엄이 서하와의 싸움에서 큰 역할을 했다. 방어시설을 강화하고 변경의 군 기강을 바로 세웠다. 서하 사람들이 “범중엄 가슴 속에는 수만 군대가 들어 있다”고 범중엄을 깊이 존경했다.

요, 서하 등에 대한 과도한 세폐 지급, 대외전쟁의 실패 등으로 국정 개혁의 요구가 커졌다. 인종이 경력변법(慶曆變法)을 추진한 배경이다. 참지정사 범중엄에게 방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범중엄은 십사소(十事疏)를 올렸다. 관리의 승진 제도를 엄격히 시행할 것, 음서제를 억제할 것, 과거제도를 엄중히 실시할 것, 지방장관을 공정히 선임할 것, 공전(公田)을 고르게 할 것, 농업과 누에고치 생산을 장려할 것,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부병제를 실시할 것, 조정의 은혜와 신의를 제대로 갖출 것, 조정의 명령을 신중히 할 것, 부역을 줄여 농사에 전념토록 할 것 등이다. 관료제도와 민생 대책에 역점을 둔 경력신정으로 조정의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그러나 보수 세력의 반대로 시행 1년만에 범중엄, 부필, 한기 등 개혁 세력이 중앙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여건이 성숙된 연후에 개혁을 추진하자는 개혁파의 건의를 무시하고 서둘러 추진해 갖가지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곽황후 폐립은 인종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곽황후는 성정이 격해 여러 차례 황제와 대립하였다. 결국에는 황제의 용안을 손상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재상 여이간도 황후 폐립을 지지했다. 경우 원년(1034년) 곽황후를 폐하고 요화궁에 살도록 했다. 마음이 여린 인종은 때때로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시의(侍醫)를 보내기도 하였다. 경우 3년 황후가 병사하자 황후의 지위를 복원하고 황제의 능묘에 안장하였다.

백성에 대한 연민의 정이 깊은 황제였다. “궁궐이 즐거우면 백성이 적막해진다”며 황실이 근검하고 절도를 지킬 것을 강조했다. 부친 진종의 예를 따라 황제권 행사를 자제하고 ‘모든 일을 관료들과 상의’하는 중의 정치를 지향했다. 여이간, 범중엄, 한기, 부필, 구양수, 문언박 같은 명신들이 정사를 주도했다. 주돈이, 정호, 정이 같은 뛰어난 유학자가 배출되어 북송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소철이 진사시험에서 황제가 백성의 어려움에 관심이 적고 대신들과 정사를 제대로 의논하지 않는다는 답안을 제출했다. 시험관들이 소철을 처벌할 것을 주청했지만 인종은 과거는 본래 직언을 잘하는 인재를 뽑는 것이라며 일소에 부쳤다. 포청천이 황제의 면전에서 침을 튀기며 간언했는데 침방울을 소매 자락으로 닦으며 그의 주장을 경청했다. 화려한 음식을 즐겨하지 않아 연회상에 오른 동죽조개 100개가 2800냥에 해당한다는 말을 듣고 먹지 않았다. 인종이 붕어하자 개봉의 상인들은 문을 닫고 거리에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