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천년 전라도의魂<21>계곡 굽이굽이 그림같은 풍광, 주옥같은 시가를 낳고…
<제3부> 전라도, 문화예술 꽃피우다 ④ 인문학의 모태 ‘누정’
호남 사림의 명소 소쇄원
성산별곡 탄생지 식영정
시조·가사의 산실 면앙정
무등산 자락·영산강·섬진강 주변
어김없이 들어선 정자
2019년 11월 04일(월) 04:50
광주와 담양이 만나는 무등산 자락과 광주호로 흘러드는 창계천 주변으로 소쇄원·식영정·취가정·환벽당·독수정·풍암정이 이웃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우리나라 시가문학의 산실로 소쇄원 시단, 식영정 시단, 면앙정 시단이 활동했다. 면앙정의 가을 풍경. /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무등산 자락과 광주호, 그리고 영산강·섬진강·보성강 주변의 풍광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누정이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품은 곳에,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그 곳에서 홀로 쉬거나, 여럿이 오붓하게 모여, 정서를 교감하며 학문과 시가를 나눈 열린 공간이다. 휴식처이자 인문학의 산실이 곧 ‘누정’이다.

건축학 용어로 ‘누(樓)’는 눈높이 위에 자리한 건물이며, ‘정(亭)’은 기둥 사이에 벽을 두지 않고 사방을 튼 건물을 말한다. 높은 자리에 건물을 짓고 사방을 트이게 한 개방적인 건물이 ‘누정’인 것이다. 단, 온돌방은 있으나 부엌은 없다. 학문을 논하고 문학을 즐기지만, 먹고 사는 공간은 아니라는 의미다.

소쇄원


우리나라 누정 역사는 삼국시대 신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는 488년 신라 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최초다. 1530년 조선 중종 때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누정은 조선 팔도에 3000여개에 이를 정도였다. 영남이 1295개로 가장 많았고, 호남은 1070개에 이른다. 영남의 누정은 이웃 건물로 지어진 데 비해, 호남은 독립된 공간에 외따로 지었다는 점이 다르다.

광주와 담양이 만나는 무등산 자락과 광주호로 흘러드는 창계천(증암천) 주변으로 소쇄원·식영정·취가정·환벽당·독수정·풍암정이 이웃하고 있다. 옛날 창계천을 ‘자미탄’이라 불렀다는데, 자미(紫薇)는 배롱나무의 별칭이고 탄(灘)은 여울이라는 뜻이니, 개울 양 옆으로 늘어선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으로 얻은 이름일 테다. 조금 떨어진 담양에는 명옥헌·송강정·면앙정이 있고, 광주 극락강에는 ‘제일호산(第一湖山)’ 풍영정이 있다.

식영정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던 사림들은 누정에서 주옥같은 시와 글을 지었다. 이른바 시가문학이다. 그래서 이 곳을 시가문학의 산실이라고 한다. 소쇄원 시단, 식영정 시단, 면앙정 시단은 시가문학의 메카였다. 호남가단의 선구자 면앙정 송순, 한시의 대가 석천 임억령, 환벽당 주인 사촌 김윤제를 비롯해 성산사선(星山四仙 : 임억령·김인후·기대승·양응정), 식영사선(息影四仙 : 임억령·고경명·정철·김성원)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 곳에 자취를 남긴 이들로는 퇴계 이황, 박상·박우 형제, 양팽손, 윤구, 나세찬, 이항, 송인수, 유희춘, 유성춘, 임형수, 박순, 이후백, 백광훈, 백진남, 정홍명, 오겸, 최경창, 임제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누정 답사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의 통박이다. “답사 초보자들은 이름난 정자에 다다르면 정자의 건물부터 유심히 살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답사라고 생각하는 습성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건물이 아니라 위치이니, 정자의 누마루에 걸터앉아 주변을 조용히 둘러보는 맛, 그것이 본질이다.” 명심하자.

◇우리나라 으뜸 원림 ‘소쇄원’

소쇄원과 명옥헌은 정원(庭園)이 아닌 원림(園林)이다. 원림은 자연을 거스리지 않으면서 적절히 조영을 한 것을 말함이다. 특히 소쇄원은 민간 별서원림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원림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 별서는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치 좋은 곳에 조성된 것으로, 오늘날 별장과 같은 개념이다.

주인은 소쇄처사 양산보다. 양산보는 나이 15세 되던 1517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정암 조광조의 문하생이 되었다. 17세에 과거시험에 실패하고 기묘사화로 낙향했으며, 25세에 상처(喪妻)하는 슬픈 사건들이 잇따랐다. 벼슬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평생을 처사로 살아가게 된 배경이다.

소쇄는 어려운 한자어다. 빗소리 혹은 물 맑고 깊을 소(瀟), 물 뿌릴 혹은 깨끗할 쇄(灑)다. 중국 남조시대 제나라 사람 공덕장이 쓴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것으로,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말이요, ‘속세를 떠났다’는 뜻이 내포됐다.

소쇄원은 양산보의 은둔처였지만, 그의 곧은 뜻을 알게 된 사림들은 소쇄원을 사랑방처럼 드나들었다. 주인의 인품과 학식 덕에 열린 공간으로 호남사림의 명소가 됐다. 소쇄원에는 돌 하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계곡 한 구석 허투로 내어있지 않다. 주인과 선비들의 철학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당대 문장가들은 소쇄원에 대한 찬시를 아끼지 않았다.

하물며 시인이 아닌 필자로서는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형언키 어려워 선인의 글로 대신한다. 임재왜란 의병장인 제봉 고경명의 무등산 기행문 ‘유서석록(遊瑞石錄)’의 소쇄원 풍경이다. “계곡물이 집 동쪽으로부터 와서 담장을 통해 뜰 아래를 따라 흘러간다. 그 위에는 자그마한 외나무다리(略작)가 있는데, 외나무다리 아래의 돌 위에는 저절로 웅덩이가 이루어져 이름하여 조담(槽潭)이라 한다. 이 것이 쏟아지면서 작은 폭포가 되니 영롱함이 마치 거문고 소리 같다. 조담 위에는 노송이 서려 있는데 마치 덮개가 기울어 못의 수면을 가로 지나가듯 한다. 조그마한 폭포의 서쪽에는 작은 집(光風閣)이 있는데 완연히 그림으로 꾸민 배 모양이다. 그 남쪽에는 돌을 포개어 높여서 작은 정자(瀟灑亭)를 지었으니 그 모습을 펼치면 우산과 같다. 처마 앞에는 벽오동이 있는데 해묵은 연륜에 가지가 반이 썩었다. 정자 아래에는 작은 못을 파서 쪼갠 나무로 계곡물을 끌어 여기에 대었다. 못 서쪽에는 연못이 있는데 돌로 벽돌을 깔아 작은 못의 물을 끌어 대나무 아래로 지나게 하였다. 연지의 북쪽에는 또 작은방아가 있다. 어느 구석을 보아도 수려하지 않은 곳이 없다.”

광주 극락강 풍영정에 걸린 수많은 편액은 당대 거장들의 시화전이다. /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식영정과 환벽당, 그리고 면앙정

“흐름을 타면 나아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그치는 것이고 / 가고 멈춤은 사람의 마음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 내가 숲으로 들어온 것도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요 / 한갓 그림자를 쉬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 내가 시원하게 바람을 타고 / 조물주와 짝이 되어 / 멀리 떨어진 들판에서 노닐 적에 / 그림자도 없어질 것이며 / 사람이 바라보고도 가리킬 수 없을 것이니 / 이름을 ‘식영’이라 함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임억령이 ‘식영(息影)’이라 이름 한 까닭이다. 즉슨, ‘그림자도 쉬어가는’이 아니라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이다. 한시의 대가 석천(石川) 임억령이 주인이다. 지은 이는 임억령의 사위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다. 제자이자 사위인 김성원이 장인을 위해 지은 정자다.

식영정은 ‘성산별곡’의 배경으로, 창계천 끝자락이자 광주호 초입의 벼랑 위에 숨은 듯 자리하고 있다. 비탈을 따라 차곡차곡 쌓은 돌계단을 비스듬히 걸어오르면 식영정 마당이다. 400년 노송이 용틀임하듯 몸통을 비틀고 있다. 울울창창, 세월과 생기를 동시에 머금었다. 식영정의 명물이다. 400살을 조금 넘겼으나, 요즘은 천년송이라고도 불린다. 노송 뒤로 가면 송강의 ‘성산별곡’ 시비가 놓여 있다. 식영정 마루 끝에 걸터 앉으면 광주호가 한 눈에 보이는 풍광을 마주하게 된다.

식영정 발치에는 서하당(棲霞堂)과 부용정(芙蓉亭)이 있고, 건너편에는 ‘푸르름을 사방에 가득 두른 집’ 환벽당(環碧堂)이, 그 아래에는 취가정(醉歌亭) 있다. 모두가 이웃이자, 일가친척이다.

환벽당의 주인은 사촌(沙村) 김윤제다. 정철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가기까지 유숙하며 공부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정자 아래에는 김윤제와 정철의 아름다운 만남에 대한 전설이 서려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가 있다. 전설은 이렇다. “김윤제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조대에서 한 마리 용을 발견하였는데, 나가보니 소년이 목욕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송강 정철이었다.” 정철은 이렇게 김윤제의 눈에 띄어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김윤제는 그의 외손녀를 정철에게 시집보낼 정도로 아꼈다.

소년 정철이 멱을 감던 바위에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두 소나무는 임억령과 김윤제다. 서로 말없이 바라만 봐도 통하는 마음 푸르도록 시원하다.

송강정(松江亭)도 빼놓을 수 없다. 송강이 짓고 기거하던 곳으로, 학창시절 고전문학시간에 만났던 조선 최고의 가사로 칭송받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의 산실인 까닭이다. 송강의 터전은 ‘성산별곡’을 노래한 식영정 인근이 아니라 10㎞가량 담양 고서 쌍교 인근의 분토마을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시련이 있을 때마다 이 곳 송강정에서 마음을 추스렸다. 송강정은 쌍교 아래 흐르는 강이름이 송강이어서 붙여진 정자다.

담양 쪽으로 조금 더 가면 봉산면 제월봉 자락에 면앙정(免仰亭)이 있다. ‘면-면유지(免有地·숙이면 땅이요) / 앙-앙유천(仰有天·우러르면 하늘이라) / 정-정기중(亭其中·그 가운데 정자를 앉혔으니)’ 우리나라 최초 3행시로 기록된 장소다. 면앙정은 송순의 호이자 정자의 이름이다. 전남도기념물 제6호다. 면앙정은 시조·가사·한시문 등 다양한 시가문학을 탄생시킨 곳이다. 송순의 ‘면앙정가’는 정철의 ‘성산별곡’ 등 가사문학의 전통을 잇는 주옥같은 작품들의 자양분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광주 신창동 극락강 모퉁이 우뚝 솟은 언덕에 ‘바람의 정자’가 있다. 호남제일이라는 닉네임의 ‘풍영정(風詠亭)’이다. 조선 최고 명필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 편액이 이를 보증한다. 칠계 김언거가 주인이다. 칠계는 정년퇴임 후 꿈에 그리던 고향에 바람의 정자를 지었다. 이 곳에 올라서면 수많은 제영현판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어림잡아 70개쯤 되는 편액들이 들보와 서까래 사이에 빼곡하다. 그의 교우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는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져 자연 속에서 500여년 동안 연일 ‘대가들의 시화전’이 열리는 ‘조선판 살롱’이다.

/담양=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