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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천년인물]<40> 보성 나철 (상)
“을사오적 처단해야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
대종교 중창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교육자
29세 문과 합격 후 관직 접고 항일 단체 유신회 조직
‘한국 주권 보장’ 일왕에 동양평화 촉구·단식농성
‘자신회’ 조직 오적 처단 나섰지만 실패 ‘10년 유배형’
구국의 한 뒤로하고 단군 모신 사당 삼성사에서 순교
2018년 11월 28일(수) 00:00
을사오적 처단 의거 당시 작성된 살인 허가장.
보성 벌교에 지난 2016년 개관한 나철기념관. 이곳에는 대종교를 중창한 독립운동가 나철의 삶과 사상이 응결돼 있다.








“이번 거사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2천만 민족의 원한을 갚는 것이다.”(나철 ‘동맹서’ 중에서)

1907년 서울에서 나철 선생은 5적 암살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결연한 의지를 ‘동맹서’에 담았다.

홍암(弘巖) 나철(1863~1916). 대종교를 중창한 독립운동가이다. 나철은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병폐를 쓸어야만 자손들이 독립된 나라에서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운명이 오적 암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나철에 대한 지식은 단편적인 앎에 머물러 있다. 역사시간에 배운 대종교를 중창한 초대교주라는 것이 대체적인 지식이다. 그러나 한 사람을 볼 때, 단편만을 보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은 한 인물의 생애에는 종교를 넘어, 다양한 생의 이력 그리고 정치적·사회적 관점에서의 신념 등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나철 선생이 그러한 경우다. 그의 삶은 종교 지도자, 항일운동가, 민족사학자, 교육가 등 스펙트럼이 넓다. 역설적으로 시대의 불운만 없었다면, 다시 말해 구한말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세속적인 성공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생애를 톺아보기 위해 벌교로 남행한다. 언제 가도 벌교에는 남도의 고즈넉한 풍광과 점액질 같은 끈끈한 정서가 드리워져 있다. 갯벌로 대변되는 모성의 생명력과 강직함으로 대변되는 사나이의 정서 같은 게 맞물려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더러 긍정적 측면에서의 남자다움으로 다가왔던 것은 지역이 주는 투박함과 근기와 무관치 않을 것 같다.

벌교에서 태어난 나철 선생은 그런 지역적 자장 안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그처럼 특정한 인물의 성장과 지역의 불가분의 관계는 바늘과 실처럼 연계돼 있다.

나철은 1863년 12월 2일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나용집의 셋째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의 본명은 ‘두영’이었으나 ‘인영’으로 개명했다. 이후 대종교 중광 후 ‘철’로 바꾸었다고 한다.

지난 2016년에 개관한 나철 기념관은 나철의 독립정신이 응결된 공간이다. 초겨울의 찬바람 끝에 그의 결기가 느껴져 오히려 따스움 마저 감돈다. 바람결에 스민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이 오늘에까지 이어지나 보다.

나철의 본관은 나주, 호는 홍암(弘巖). 당호는 일지당(一之堂)이다. 그는 어린 시절 집안 형편으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다소 늦은 나이지만 29세에 문과에 합격해 승정원가주서 등을 역임한다.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은 오래지 않아 끝나고 만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의 지사들을 규합해 유신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한다.

홍암 나철 선생.






나철은 외교항쟁의 중요성을 간파하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여론을 환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신념하에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기, 오기호, 홍필주 등과 함께 한국의 주권을 보장하라는 서신과 함께 일왕에게 동양평화를 촉구한다.

그러나 나철의 의도와 달리 일본은 아무런 답도 보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궁성 앞에서 단식을 하는 것으로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알린다. 그러나 대일외교항쟁은 수포로 돌아갔고 설상가상으로 을사조약 체결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다. 그는 가슴에 칼을 품고 귀국하기에 이른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처단해야 조선을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각오를 다지고서.

나철은 의거 실행을 위해 대원을 모집하고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한다. 200여 명에 달하는 동지들 가운데 30명을 선발하고 ‘참간장’(斬奸壯)이라는 증서를 배부한다. 이완용,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등이 이들의 처단 대상이었다.

마침내 나철과 비밀요원들은 군부대신 권중현을 암살하기 위해 거사를 단행한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처단하는, 겨레의 원한을 갚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대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현장에서 결사대원들이 체포되고, 일제는 나철의 행방을 찾기 위해 갖은 고문을 가한다. 동지들이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는 것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일본 헌병을 찾아간다.

재판 결과 그는 10년형을 선고 받고 신안군 지도로 유배된다. 이후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이 무렵 나철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단군교 중광에 착수한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교구를 개편해 독립운동기지로서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당시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대종교를 종교보다는 항일독립운동단체로 보았다. 남도본사가 강제 해산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나철은 일제의 악랄한 만행과 집요한 탄압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이제 많은 동포가 괴로움에 떨어지는 죄를 대신 받아 천하를 위하여 죽노라.”

1916년 8월 15일 구월산 삼성사에서 홍암(弘巖) 나철 선생이 유서를 남기고 순명(殉名·명예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했다.

그러나 나철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예언시’는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언젠가는 우리가 달성해야 할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 오늘의 시간에 아프게 다가온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