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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의유럽 예술기행 <8> 오스트리아-크렘스
영원한 아이로 살았던 실레의 그림을 만나다
17살 실레, 크림트 멘토로 삼고
뭉크·고흐 작품 만나며 ‘미적 개안’
인간의 모습 뿐 아니라 性도 탐구
소녀 누드화·미성년 유혹·외설…
주변의 따가운 시선…법정 서기도
아내 사망 3일 뒤 28세에 요절
2018년 11월 27일(화) 00:00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크렘스의 괴트바이그 수도원.
이탈리아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가는 날이다. 아침에 리조트 리셉션에서 수속을 마치고 짐을 챙겨 나오는데 레스토랑의 종업원 리오넬이 급히 뛰어온다. 15일 동안 마주치면서 정이 들었나 보다. 음식을 시킬 때마다 메뉴판을 들고 와 10분 정도 친절하게 안내해주던 청년이다. 나는 그에게 명함을 내민다. 짧은 영어지만 눈빛으로 많은 대화를 나눈 셈이다. 구스터 씨가 알려준 대로 폴로니카역에서 로마 트라스테베레(Romma Trastevere)역으로 갔다가 환승해 후미시노공항(Fumicino Aeroportoan)역에서 내려야 한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 가는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타려면 3시간 정도 여유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막상 공항에 도착해 보니 비행기 출발시간이 늦어지면서 게이트가 두 번이나 바뀐다. 인천공항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고성과 항의가 오고갔을 텐데 여기서는 모두 순한 양이다.

이윽고 탑승하여 좌석에 비치된 오스트리아 신문을 보니 김정은 위원장 사진이 1면 톱을 장식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북미대화에 관심이 많다는 방증이다. 2차 북미대화가 지연되고 있는데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후미시노공항에서 빈 공항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30여 분. 빈 공항에 내리니 클래식 뮤직 메니지먼트 회사인 IMK 권숙녀 회장이 마중 나와 있다. 3년 전에도 권 회장의 초청을 받아 온 적이 있기 때문에 구면이다. 베토벤가세(Beethoven Gasse), 베토벤 거리에 있는 권 여사의 사무실 별채로 가서 하룻밤을 묵을 터. 베토벤이 운명한 건물이 있으므로 베토벤가세로 명명했다고 한다.

내일은 빈보다 오래 된 도시로서 우리나라 경주와 흡사한 크렘스에 가기로 돼 있다. 크렘스는 빈에서 승용차로 1시간여 거리. 3년 전에도 크렘스를 들른 적이 있으므로 낯선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다.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자락의 도심지. 포도밭 너머로 멀리 도나우 강이 햇빛에 반짝이는 전원도시. 산정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괴트바이그(Stift Gottweig) 수도원이 있고.

실레가 태어난 도시 툴른의 도나우 강변에 있는 에곤 실레박물관.




구석기 조각상 빌렌도르프 비너스.








하룻밤이 번개처럼 지나갔나 보다. 권숙녀 회장이 어제와 같은 밝은 모습으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크렘스 베흐너 박사 댁으로 가기 위해서다. 권숙녀 회장과 베흐너 박사는 부부 사이. 베흐너 박사는 원래 크렘스 지역의 공공의사였다가 은퇴했는데 지역농민들이 붙잡는 바람에 도나우 강변에 집을 마련하고 주저앉았단다. 3년 전에 왔을 때 들은 얘기다. 그는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다. 환자를 진료하는데 시간에 구애받지 않기 위해서라고. 우리나라 의사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된다. 아직도 그의 손목에는 시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언가. 나와 아내에게 생각하지 못했던 감동을 선사한다. 그의 집에 들어서자 정원 게양대에 태극기가 올라가 있다. 마치 국빈대접을 받는 느낌이다.

“이 집은 원래 수도원 땅이었습니다. 이 소중한 땅을 분양해 준 신부님을 오늘 만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괴트바이그 수도원으로 올라가 성당을 둘러본다. 운 좋게 베흐너 박사에게 땅을 분양해 주었다는 수도원 살림총책임자인 마우러스(Pfarreev Maurus) 신부와 마주친다. 신부는 발에 기브스를 한 상태다. 신부의 설명을 듣는다.

“괴트바이그 수도원은 1403년에 창건했으나 화재로 전소됐다가 1718년에 복원했지요. 크렘스는 화이트와인 주생산지입니다. 토질이 사질과 석회석이 섞여 있어 포도재배에 적합하지요. 이곳은 집집마다 와인셀러 창고가 있습니다. 크렘스는 2006년에 천년이 됐지요.”

베흐너 박사는 손가락에 기브스, 마우루스 신부는 발에 기브스를 하고 있다. 신부가 ‘서로 기브스를 하고 있는데 일하다가 다친 훈장’이라며 유쾌하게 웃는다. 상처를 훈장이라고 하니 부지런한 신부답다. 다음의 행선지는 조각상 비너스가 발굴된 빌렌도르프. 베흐너 박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는 도나우 강변을 달린다. 독일 쪽으로 가는 방향이다. 빌렌도르프로 가는데 도나우 강을 낀 협곡이 이어지고 있다. 협곡 산자락은 하나같이 계단식 포도나무 다랑이 밭이다. 비너스도 포도밭을 개간하다가 발굴했다고 한다. 2만4900년에서 2만3900년 사이의 구석기에 만든 조각상이라고 추정하는데 크기는 11㎝쯤 된다. 곱슬머리이고 두 손은 큰 유방 위에 놓여 있으며 배는 만삭의 여인처럼 크다. 당시 구석기에는 비만한 여인이 이상형이었을까. 여기에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니 하고 요즘의 잣대로 의미를 덧붙이지 말자. 거리에서 자주 마주쳤던 서구여인들의 큰 체구와도 흡사하다.

베흐너 박사 댁에 돌아오니 이미 사위는 어둡다. 도나우 강물이 흐르는 소리만 따뜻하게 들린다. 수도원 땅이어서인지 기운이 맑다. 내일은 다시 빈으로 돌아가는데 내가 정작 보고 싶었던 곳은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박물관. 빈과 크렘스 사이의 툴른(Tulln)이라는 작은 도시에 있으니 관람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음날은 베흐너 박사 대신 권 회장이 나와 아내를 안내한다. 목이 길쭉하여 시인 이상과 어딘지 비슷하게 생긴 실레. 그가 태어난 도시 툴른으로 가서 그의 그림들을 만난다고 하니 가슴이 설렌다. 실레의 굴곡진 인생은 대략 이렇게 알려지고 있다.

툴른에서 툴른역장 아들로 태어난 실레는 11살 때 부모가 인근 크렘스로 이사하여 그곳의 학교로 전학한다.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하자 철도회사 직원인 외삼촌의 보호를 받는다. 외삼촌은 실레가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알고 1906년 16살인 그를 빈의 미술학교로 보낸다. 그러나 실레는 미술학교의 전통적인 보수주의 입장에 반대하여 자퇴해버린다. 전화위복이랄까, 실레는 1907년 크림트를 만나 멘토로 삼는다. 크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의 그림을 사주거나 후원자를 연결해준다. 실레는 3년 동안의 빈 아카데미를 마친 뒤 아카데미에 불만을 가진 동료들과 새로운 예술 그룹(Neukunstgruppe)을 결성한다. 크림트는 1909년 한 전시회에 실레를 참여시켰는데, 여기서 실레는 에드바르트 뭉크, 얀 투롭,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을 만나면서 미적 개안을 한다. 이후 실레는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Sexuality)도 탐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프라하, 부다페스트, 쾰른 등의 도시에서 단체전 일원으로 참가하다가 1913년부터는 뭔헨이나 파리에서 독자적인 개인전을 가진다. 실레의 사생활은 알려진 대로 불우하다. 1911년 실레는 빈에서 17세의 발리(Wally)를 만나 살게 됐는데 그녀는 실레뿐만 아니라 크림트의 모델이었다고 한다. 빈을 떠나 어머니의 고향인 체코의 체스키크롬로프(옛 지명, Krumau)로 갔지만 사춘기 소녀 누드화를 그렸다며 마을사람들의 비난을 받고는 쫓겨난다. 그러나 실레의 주장은 에로틱한 작품도 신성하다는 것. 그들이 다시 간 곳은 빈에서 서쪽으로 35㎞ 떨어진 노이랭바흐(Neulengbach)의 값싼 작업실. 그러나 그곳에서 실레는 미성년 소녀를 유혹했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경찰은 수백 장의 드로잉과 회화 작품들을 포르노라 하여 압수하고 재판을 받게 하는데 실레는 21일간의 구류와 3일간의 구속을 당한다. 재판장에서 실레의 그림 한 장을 태우기도 한 판사는 미성년자의 유혹과 유괴 혐의는 기각하지만 외설적인 그림의 전시는 유죄로 인정한다. 이후 실레는 발리와 헤어지고 1915년 자물쇠 장인의 딸인 에디트((Edith)와 결혼한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은 실레의 작업에 영향을 준다. 결혼 3일 만에 군복무를 위해 프라하로 떠났던 것. 1917년 빈으로 돌아온 실레는 작품 활동에만 집중한다. 1년 만인 1918년 빈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 실레의 작품 50점이 초대된다. 전시회 포스터는 실레가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하여 예수의 자리에 자신의 모습을 넣어 화제를 뿌린다. 실레의 삶은 거기까지. 하늘이 그를 부른 것이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전 유럽에 2000만 명의 환자를 발생시켰는데 임신 6개월인 실레의 아내는 결국 가을에 사망하고 실레는 그의 아내가 사망한 지 3일 만에 28세 청년의 모습으로 눈을 감는다.

실레박물관도 도나우 강변에 있다. 도시가 작아선지 쉽게 찾아진다. 박물관 입구에는 실레의 청동상이 있다. 아침이기 때문에 관람객들이 많지는 않다. 우리는 1층과 2층에 전시된 실레의 작품들을 감상한다. 초기의 풍경화나 인물화는 인상파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그림의 색조가 어두워지고 불균형적이고 성적 표현이 과장돼 있다. 표현주의적인 이러한 작품들을 괴이하며 퇴폐적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울한 천재의 심상을 가식 없이 투사한 그림을 그렇게만 평할 수 있을까. 실레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한, 실레를 정확하게 이해했던 레오폴드(Diethard Leopold)는 실레를 ‘영원한 아이’라 했고 “아이들 시선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아이들 그림은 현실의 반영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편견과 선입견이 없는 아이로 남아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세상인가! 빈의 레오폴드박물관에서는 크림트와 실레 사후 100주년 기념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니 때마침 오스트리아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 정찬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