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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천년인물 열전 <39> 담양 고광순 의병장
고경명 선생의 12대손 고광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잇다
“을미사변 원흉 단죄” 고종에 상소…지리산 피아골서 일본군 맞서다 순절
2018년 11월 21일(수) 00:00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 자리한 녹천 기념관에 보존중인 녹천 고광순 의병장 초상화.
요즘 한국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명예를 가진 사람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사회지도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그동안 숨겨져있던 치부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만다.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장흥 고씨 집안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바치고, 학교를 세워 동량(棟梁)이 될 인재를 길러낸 명문가다. 녹천(鹿川) 고광순(1848~1907) 의병장은 임진왜란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충렬공(忠烈公) 제봉 고경명 선생의 둘째아들인 의열공 학봉 고인후의 11대 종손이었다. 300여년의 시간을 두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총을 들고 일어선 후손의 의기(義氣)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1907년 9월(음력), 녹천 고광순 의병장은 ‘축예지계’(畜銳之計) 전략으로 전환했다. 의병을 일으킨지 10여년 동안 일본군이나 경찰과 임기응변식으로 전투를 벌여왔지만 앞으로는 새로운 근거지에서 장기적인 항전태세를 갖추고 예기(銳氣)를 기르면서 ‘게릴라전’을 벌인다는 구상이었다. 새로 마련한 근거지는 지리산이었다. 지리산 여러 골짜기 가운데 피아골이 장기전에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화개, 서쪽으로는 구례,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연결돼 장기전에 유리했다.

녹천 부대는 편제와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고광순이 도독을 맡고, 박성덕과 고제량이 도총과 선봉을, 신덕균과 윤영기 등이 참모를 맡았다. 화순군 동복 헌병분견소를 공격한 후 남원~곡성~광양~구례를 거쳐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갔다. 은거지는 피아골 입구에 자리한 천년고찰 연곡사였다.

녹천은 이곳을 의진 본영으로 삼았다. ‘불원복’(不遠復) 세자를 쓴 태극기를 만들어 군영앞에 세웠다. 대장기이자 군기였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의 없어졌던 양기가 머지 않아 회복된다는 의미로, 머지않아 나라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드러내는 문구였다.

녹천이 처음 의병을 일으킨 때는 49살(1896년)때였다. 8월에 일본이 자객들을 동원해 명성황후를 궁궐에서 시해(을미사변)한데다 10월에는 단발령이 선포됐다. 송사 기우만, 성재 기삼연 등과 함께 의병을 규합했으나, 관군의 탄압과 고종의 해산 명령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의병을 일으키기 전 녹천이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당시의 결기를 읽을 수 있다.

의열공파 14대 종손 고영준 씨가 녹천 고광순 의병장이 군기로 사용했던 ‘불원복(不遠復) 태극기’(복제본)를 펼쳐보이고 있다. 가로 129㎝, 세로 82㎝ 크기로, 원본(등록문화재 394호)은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 위탁해 관리하고 있다.




녹천 의병장이 1896년 1월에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비판하며 올린 상소문.








“신은 곧 의열공의 사손(祀孫·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으로 조상의 지켰으니 임금을 그리는 마음이 일분일초라도 어느 가문에게나 양보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본인은 국가의 원수이니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는 한편 선조의 원구를 위로한다면 신이 비록 죽음을 당할 지라도 살아있는 것이나 같은 것이니 신은 할일을 다했다고 할 것이요, 신은 소원을 끝냈다고 할 것입니다.”

이때 녹천은 의열공 학봉 고인후의 11대 종손임을 밝히며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주창했다. 학봉은 제봉 고경명 선생의 둘째 아들이었다. 제봉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상격문(馬上檄文)을 써서 6000~7000명의 의병들을 모았다. 학봉은 큰형(준봉 고종후)와 함께 출전했다. 제봉이 지휘하는 호남의병부대는 한양으로 북상하던 중 왜군 대부대가 전라도로 침입하려 하자 충남 금산 누운벌에서 혈전을 벌였다. 이때 제봉과 학봉과 많은 의병들이 순국했다.(장남 준봉은 ‘복수 의병장’이라 칭하며 이듬해 7월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순절했다.) 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제봉 집안에서 모두 9명이 목숨을 잃었다.

학봉이 순절하자 황해감사를 지낸 장인(덕봉 이경)과 장모가 고아가 된 학봉의 세아들(외손자)을 대촌에서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로 데려와 키웠다. 이후 학봉의 후손들이 창평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형성한 연유다. 외가의 돌봄속에서 학봉의 차남인 월봉 고부천이 대과(大科)에 합격하고 서장관(書狀官·중국에 보내는 사신가운데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기록관)을 지냈다.이렇게 장흥 고씨는 제봉의 할아버지인 하천공(고운)부터 5대째 내리 대과 급제를 하고, 3대가 서장관을 지내는 명문가의 맥을 이어갔다.

녹천이 두번째로 의병을 일으킨 때는 59살(1906년)때 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등 조선침탈을 본격화하던 시기였다. 녹천은 1906년 11월, 거의(擧義)했다. 고종은 녹천에게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애통조’(哀痛詔)를 보냈다. 녹천은 1907년 1월 24일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 전주이씨 제각에서 500여명의 의진을 결성했다. 부장 고제량, 선봉장 고광수, 좌익장 고광훈, 우익장 고광채, 참모 박기덕, 호군(護軍) 윤영기, 종사(從事) 신덕균·조동규 등 편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능주 양회일, 장성 기삼연 등 타 지역 의병장들과 연합해 창평, 화순, 능주, 동복, 남원 등지를 무대로 활동을 펼쳤다. 일본 군경은 면암 최익현과 성재 기삼연, 녹천을 1906~1907년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으며, 녹천을 ‘호남의병의 선구자’, ‘고충신(高忠臣)’이라 불렀다.

1907년 음력 9월 11일(양력 10월 16일) 새벽, 화개에서 출동한 일본 군경이 녹천 의병부대가 머물던 연곡사를 포위했다. 진해에서 온 중포(重砲) 부대까지 동원했다. 의병 대다수가 출진하고 절에는 녹천과 선봉장 고제량 등 의병 13명이 남아있었다. 녹천과 고제량은 일본군의 집중사격에 응사를 하다 순절했다. 마을주민 임준홍이 일본군의 눈을 피해 녹천과 고제량의 시신을 불탄 절 뒷편 채소밭으로 옮겨 솔가지로 덮어놓았다. 일본군의 기습 때 의병명부를 들고 탈출했던 동생 고광훈이 나흘 뒤 연곡사를 찾아와 임시로 봉분을 만들었다. 다음날 매천 황현이 녹천의 무덤을 찾아와 곡을 했다. 며칠전 녹천은 구례 광의면에 사는 매천에게 격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무덤 앞에서 매천은 칠언시를 지었다.

“우리처럼 글만 하는 선비들은 무엇에 쓸 것인가(我曺文字終安用)/ 명조(明祖·의병장 고경명과 인후 부자를 뜻함)의 가풍을 이은 풍성(風聲)을 따를 길 없네(明祖家聲不可當)···.”

매천은 3년 뒤인 1910년 경술국지 직후 음독 자결한다. 이때 남긴 절명시 4수 가운데 “가을 등잔불 밑에 책을 덮고 수천년 역사를 회고하니/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녹천을 ‘2002년 10월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묘소는 마을 뒷산 의열공옆에 모셨다가 수년전 국립 대전 현충원 4 묘역(567)으로 이장했다.

녹천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칼과 총을 들었을 때 같은 마을 춘강 고정주(1863~1933)는 학교를 세웠다. 무력투쟁대신 나라의 대들보가 될 인재를 양성하는 노선을 택한 것이다. 1906년 마을 뒤 문중 상월정에 영어와 산수를 가리키는 ‘영학숙’(英學塾)을 세웠고, 1907년에 창평현 객사를 수리해 ‘창흥의숙’(昌興義塾·현 창평초등학교 전신)을 열었다. 두 사람의 노선은 대립하지 않았다. 춘강은 녹천부대가 쌀을 가져가는 것을 묵인하는 등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장흥 고씨 문중 사람들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에 의병을 일으켰던 가풍을 ‘제봉 정신’에서 꼽는다. 바로 제봉이 후손들에게 남긴 ‘세독충정’(世篤忠貞·가족들은 돈독히 살고 나라에 충성을 하라)이다. 녹천 사위는 기삼연 의병장의 종손이자 자강회(을사오적 처단 결사대)멤버인 기산도이다.

의열공파 14대 종손 고영준(79)씨는 녹천 고광순 의병장의 의로운 삶과 항일정신이 학생들과 청년세대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의병사와 근세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이 매년 300~400명씩 상월정 등을 답사하기 위해 찾아온다. 앞으로 ‘녹천 기념관’과 ‘호남 의(義) 정신관’이 학생들의 교육의 장(場)으로 적극 활용됐으면 한다.”

/글·사진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