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의 유럽 예술기행]<5>이탈리아-피사
피사의 사탑도 언젠가는 空으로 돌아가리
1350년 완공된 1만4천t의 종 탑
연약한 모래흙 지반 때문에
매년 1㎜씩 기울어 5.5도 누워
2001년 인간의 힘으로 ‘유예’
1350년 완공된 1만4천t의 종 탑
연약한 모래흙 지반 때문에
매년 1㎜씩 기울어 5.5도 누워
2001년 인간의 힘으로 ‘유예’
![]() 연약한 지반 탓에 5.5도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과 대성당. |
![]() 맑은 기도 기운이 가득한 베툴로니아의 작은 가펠라 내부 모습. |
아침 일찍 피사로 가는 중이다. 완행열차로 폴로니카에서 피사까지는 2시간 거리다. 좌석이 듬성듬성 비어 있고 차창에는 빗방울이 스친다. 열차가 진행하는 방향은 북쪽 바닷가다. 토스카나의 끝없는 밀밭이 흐린 차창에 비친다. 열차는 여러 역을 지나치며 달린다. 역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올 때마다 이탈리어가 아름답다는 느낌이다. 중국어처럼 고저장단의 사성이 또렷하다. ‘리보르노 센트랄레!’ 센트랄레는 중앙이란 말이니 리보르노 중앙역이란 뜻이다. 이윽고 열차가 피사 역에 도착할 것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피사의 사탑. 두오모 광장에는 사탑과 대성당, 둥근 원형 세례당이 있는데 그중에서 관광객들의 눈길을 가장 먼저 끄는 건축물은 사탑이다. 세계 7대불가사의 건축물로 선정된 종탑이다. 1173년 건축가 보나노 피사노(Bonanno Pisano)가 건축을 시작했는데 3층(10미터 높이)에 이르렀을 때 지반이 내려앉아 공사를 중단했다고 한다. 바다 부근의 연약한 모래흙 지반이었으므로 그랬다. 탑의 지하 토대를 3미터밖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단했던 공사는 다시 재개되어 1350년에 완공했는데, 1만 4천 5백 톤의 대리석 탑은 매년 1㎜ 정도씩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1990년에는 5.5도나 누운 종탑이 돼버렸단다.
사탑에 오르려는 관광객들이 줄을 선 채 자기 입장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15분마다 40명 씩 들여보내고 있다. 내 순서가 되자 여자 경비원이 전자탐지기로 검색을 한다. 대리석 계단은 나선형이다. 13세기 후반부터 4번의 지진이 있었다는데 무너지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사탑을 연구한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탑은 연약한 지반으로 기울었습니다만, 모래땅 지반이 지진의 충격을 흡수해 주어서 탑은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건축물은 상하로 흔드는 지진의 충격에 가장 약한 법입니다.”
사탑이 유명해진 이유 중에 또 하나는 피사 출신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때문일 것이다. 천문학자이면서 물리학자였던 갈릴레이가 사탑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역학에서 오류를 발견했던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지상에 먼저 떨어진다고 했지만 갈릴레오는 사탑에서 실험을 통해 무거운 물체나 가벼운 물체나 동시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바, 무게의 경중이 낙하의 속도와는 무관함을 밝혀냈던 것이다. 이후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로마에서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그때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면 받는데, 재판장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어찌나 밟았던지 대리석 계단이 반질반질하다. 발에 밟힐수록 아름다워지는 존재가 계단이란 생각이 든다. 이윽고 마지막 8층에 오르자 종들이 매달려 있다. 종 너머로 피사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탑이 종교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침입하는 적군을 감시하는 망루였으리라는 짐작도 든다.
관광객에 밀려 종탑을 내려오는 중에 성주괴공(成住壞空)이란 단어가 뇌리를 스친다. 생겨난 모든 것은 일정 기간 동안 머물다가 무너져서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단어이다. 피사의 사탑도 영원한 시간 속에서는 그러하리라. 다만, 1990년에 시작한 보수공사가 2001년 6월에 완료되어 사탑은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는단다. 공으로 돌아가는 시점을 인간의 힘으로 유예시킨 셈이다.
라틴십자가 형태로 지은 피사 대성당의 문은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육중한 청동문 안으로 들어서니 제단 위 반구형 벽면에 모자이크로 장식된 ‘전능하신 그리스도’가 보인다. 치마부에(Cimabue)가 세상을 떠나기 전, 1302년에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양 옆에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 사도가 다소곳이 기도하고 있다. 제단의 왼쪽에는 르네상스시대의 거장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가 ‘최후 심판’ 등 신구약 성경의 주요내용을 조각한 설교단이 있으며, 타원형 지붕 내부에는 구름 위에 앉은 성모 마리아가 성인들과 함께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하늘나라로 오르는 ‘성모승천’(1627~1631년)이 장식돼 있다. 피사 출신의 화가 오라지오(Orazio)와 리미날디(Riminaldi)가 벌꿀에 안료를 섞어 그리는 납화법(蠟畵法·)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안내서는 설명하고 있다. 피사 대성당의 본래 이름이 ‘성모 승천 대성당’이기 때문에 이 주제를 그렸을 법하다. 그런데 나는 마지막 순서로 관람하려던 둥근 모습의 세례당은 공사 중이므로 입장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피사의 노상식당에서 스파게티로 점심을 해결한 아내와 나는 열차를 타고 폴로니카 역까지 돌아와 베툴로니아(Vetulonia) 고성으로 향한다. 가능하면 토스카나 지역의 고성을 많이 보고 싶어서다. 베툴로니아는 BC2500년 전에 로마인의 선대인 에트루니아인들이 에트루스칸 문명을 이루고 살았다는 지역의 한 고성이다. 베툴루니아 역시 다른 고성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간 곳에 있다. 월요일이므로 박물관은 문이 잠겨 있다. 할 수 없이 박물관 느낌이 나는 베툴로니아 성채까지 비탈길을 걸어본다. 아쉬웠던지 바티칸 박물관에서 보았던 에트루스칸 유물들이 기억난다. 대리석관 뚜껑, 항아리나 그릇에 새겨진 이집트풍의 눈이 큰 인물들을 흥미롭게 보았던 것이다. 기념품가게도 문이 잠겨 있다. 가게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에트루스칸 문명 유물 중에 사람과 동물상 복제품과 자코메티의 가느다란 인물상 모조품들이 보인다. 나는 자코메티의 푸르스름한 청동제 모조작품을 사지 못하고 사진만 찍는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활동한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는 ‘피카소가 질투한 현대조각가’, ‘사르트르의 친구, 실존주의 철학을 조각품에 구현한 예술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고가의 조각품을 남긴 작가’로 알려져 있다. 자코메티는 내게도 익숙한 조각가이다. 샘터사에 근무할 때 법정스님의 ‘서 있는 사람들’ 표지에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 작품사진을 이용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안내하는 구스터 씨에게 물어보니 19세의 자코메티가 이탈리아 여행 중에 동행인의 급사를 목격한 뒤 에트루스칸 유물들을 보고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문득 내 머리 속에 밝은 불 하나가 켜진다. ‘자코메티는 에트루스칸 유물들, 그중에서도 인물상들의 사실적인 선명한 눈을 보고 영감 받지 않았을까?’ 철사처럼 가늘고 긴 자코메티의 조각품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곳은 강렬한 시선이 감지되는 눈이 아닌가! 자코메티 역시도 ‘죽음과 살아 있는 개인을 구별하는 것은 시선이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실제로 자코메티는 소묘나 조각할 때 시선이 가장 중요하므로 눈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사르트르도 자코메티 전시도록 서문에서 ‘인간의 얼굴을 대표하는 것은 시선이고, 그것은 인간 의식이 가시화된 부분이다’라고 해설했던바 한층 더 분명해진다. 나는 자코메티의 조각을 비움의 미학적 구현이라고 명명하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그의 길쭉한 인물상들이 하나같이 철사처럼 가늘어진 것은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비우고 또 버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다. 이쯤에서 나는 그가 동양의 선사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도 걷는다. 내일도 걸을 수밖에 없다’는 독백 끝에 고독한 자신의 실존을 ‘걸어가는 사람’ 작품으로 표현했을 듯하므로 끝없이 만행하는 동양의 운수승(雲水僧)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여느 고성처럼 베툴로니아 성당도 마을 중심에 있다. 자코메티가 던져준 상념에서 벗어난 것은 베툴로니아 꼭대기에 있는 5, 6세기의 성벽을 보고 나서이다. 15세기에 지은 가펠라(기도실)가 인상적이다. 힘든 삶에 지친 수없는 이들이 마리아상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으리라. 때마침 성벽에 피어난 몇 송이의 꽃이 향기를 날리고 있다.
/글·사진 정찬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