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의 유럽 예술기행]<3> 이탈리아-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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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의 유럽 예술기행]<3> 이탈리아-로마
바티칸에서 미륵반가사유상을 그리워하다
2018년 08월 28일(화) 00:00
로마시대의 분수 전통을 이어 관광명소가 된 트레비분수.




바티칸 박물관의 회랑 전시관에 있는 여신과 아기천사 조각상.




바티칸 박물관의 회랑 전시관에 있는 여신과 아기천사 조각상.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 최고의 건축술로 완성한 판테온.














아침 일찍 산책하러 나선다. 핀치언덕으로 올라가 일찍이 은행경영으로 부호가 된 메디치가의 저택을 지나 스페인광장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잡는다. 스페인광장은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젤라또(아이스크림)를 먹으며 명연기를 펼친 곳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광장 계단에는 벌써 여행객들이 붐비고 있다. 오드리 헵번의 미모가 그리워서 찾아온 것만은 아닐 터. 솔직히 나는 오래 된 영화라서 그녀의 미모가 아련할 뿐이다. 영화 속의 미모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숨을 거두기 1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들에게 들려주었다는 유언이다. 시인이요 철학자 같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중략)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마지막 구절은 자리이타(自利利他), 성직자의 자애로운 언어 같다. 그녀의 아들 션 헵번 페레어는 진도 팽목항에 들러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위로한 적이 있는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 아닌가 싶다. 광장 중앙에서 뻗은 거리 초입에 있는 ‘안티고 카페 그레코’를 들르기 위해 계단에 잠시 앉았다가 일어선다. 안티고(Antico)란 ‘옛 그리스’란 뜻이다. 그리스 출신 주인이 1760년에 카페 그레코를 개업했다고 한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로 인정받아 이탈리아 문화재가 됐다고 하니 꼭 들르고 싶어진 것이다.

9시에 문을 여는 순간 바로 입장했으니 내가 카페 그레코를 찾은 첫 손님이다. 홀이 넓지는 않지만 붉은 벨벳 벽면마다 그림들이 빼꼭하게 걸려 있어 미술관에 온 듯하다. 카페가 소장한 그림이 무려 300여 점이라고 한다. 종업원들은 모두 연미복을 입고 있다. 종업원이 올 때까지 나와 아내는 그림들을 감상한다. 일몰과 일출의 어둑한 날빛 속에 드러난 모습을 그린 풍경화가 대부분이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많은데 모두가 진품이라고 한다. 카푸치노 한 잔에 9유로, 1유로의 팁까지 합하면 우리 돈으로 1만3000원 정도다. 결코 착한 값은 아니지만 미술관에 왔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사라진다.

카페 그레코에 와서 모카커피를 마시고 하루를 시작했다는 괴테. 알고 보니 괴테 이후 카페 그레코는 독일 출신 예술가와 명사들의 사교장으로 탈바꿈한다. 귀에 익은 이들만 하더라도 작곡가 멘델스존, 리스트, 바그너,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니체, 소설가 토마스 만 등이다. 슈베르트가 작곡한 ‘겨울 나그네’의 작사가인 빌헬름 뮐러도 단골손님이었단다. 독일 출신뿐만 아니라 서구의 여러 나라 예술가들이 찾아온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 영국의 시인 바이런, 키츠, 셸리도 낯익은 손님이었고 러시아의 소설가 고골리는 ‘죽은 영혼’의 마지막 부분을 카페 그레코에서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밖에도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소설가 스탕달과 마르셀 프루스트, 미국의 저술가인 벤저민 프랭클린, 소설가 마크 트웨인과 나다니엘 호손, 아일랜드의 오스카 와일드 등도 카페 그레코를 적잖게 들렀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집 부근의 방림동 다리 위에서 광주천을 프랑스의 센 강으로 생각하고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를 외우던 일이 떠오른다.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미라보다리 위에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르네. 나는 기억해야 하는가. 기쁨은 늘 괴로움 뒤에 온다는 것을’ 하고 중얼거리며 사춘기 시절을 회상해본다. 개울물이 쫄쫄 흐르는 광주천을 파리의 센 강이라고 생각했던 낭만이 새삼 그립다.

다음 행선지는 10분 거리에 있는 트레비 분수, 그리고 또 7분 거리에 있는 판테온. 트레비 분수는 로마시대의 분수 전통을 잇는 조형물. 로마시대에는 광장의 분수가 시민들에게 식수를 제공했다는데 지금은 관광용이다. 건축가 니콜로 살비의 설계로 1762년에 완공된 트레비 분수에는 그리스 신화 속 두 인물과 말들이 조각돼 있다. 중심에 돋보이는 입상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 분수대 물이 에메랄드 빛깔을 띠는 까닭은 바닥의 석회암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관광객이 몰리는 명소라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경찰이 두 명씩 조를 짜 분수대 주위를 순찰하고 있다. 분수대 물에 발을 담그는 등 공중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최대 240유로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니 조심할 일이다.

트레비 분수대에서 걸음을 재촉해 간 곳은 로톤다 광장. 오벨리스크가 있는 광장에 판테온이 있기 때문이다. ‘판테온’의 뜻은 ‘모든(판) 신(테온)’이다. 따라서 모든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므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만신전(萬神殿)이다. 라파엘로가 사랑했던 판테온 안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고 하니 확인해 볼 작정이다. 판테온은 로마 건축 기술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라고 평하는데 특히 웅장한 모습의 원형 방과 돔이 그렇단다. 유료입장으로 전환한다지만 아직까지는 무료입장이다. 그래서일까? 관광객 인파가 끝이 없다. 입구의 코린트식 화강암 기둥들 사이로 관광객들이 드나들고 있다. 사람들에 떠밀려 들어가니 원형 방이 있고, 내부 바닥은 반질반질한 대리석이다. 돔 꼭대기에 뚫린 지름 9미터의 오쿨루스(커다란 눈)를 통해서 햇빛이 들어와 내부는 환하다. 라파엘로는 주로 밤에 찾아와 오쿨루스를 투과하는 달빛을 감상했다고 전해진다. 돔 꼭대기까지의 높이와 원형 방의 둥근 바닥 지름은 정확하게 43.3m. 바로 이 부분에서 건축가들이 감탄하는 모양이고 나 역시 기둥이 없는 원형 방과 돔이 신기하기만 하다.

원형 방의 하단벽면에는 두 명의 이탈리아 왕과 르네상스 화가와 건축가의 무덤들이 죽 둘러 있다. 두 마리의 새 조각상 밑에 라파엘로의 무덤이 눈에 띈다. 현재는 원형 방에 단 한 사람의 무덤 공간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 공간에 들어갈 인물로 누가 좋겠느냐고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현존하는 축구선수였다고 한다. 이탈리아인들이 얼마나 축구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택시를 탈까 망설이다가 바티칸 박물관까지 걸어가기로 아내와 합의를 본다. 테베레 강변을 걷고 싶어서다. 마침 하늘에 구름이 끼고 바람이 살랑거려서 덥지는 않다. 바티칸박물관을 제대로 보려면 1주일은 매일 출근하다시피 해야 성에 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와 ‘최후의 심판’, 그리고 라파엘로의 방에 전시된 ‘아테네 학당’만 자세히 보기로 하고 다른 미술품과 조각품 감상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입장권은 인터넷으로 예약했으므로 줄을 설 필요는 없다. 내 판단이 옳았던 것일까? 박물관 출입구인 아치형 문 위에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상이 조각돼 있다. 수많은 화가들 중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바티칸박물관의 주인공이라는 뜻인 듯싶다.

라파엘로의 방으로 가기 전 키아라몬티 전시관으로 불리는 회랑의 조각품들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문득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여신과 두 아기천사를 조각한 작품. 큰딸이 쌍둥이를 임신해서인지도 모른다. 헤라클레스, 제우스, 아테나, 로마 황제 등등의 여러 조각상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왜 우리나라의 미륵반가사유상을 떠올렸던 것일까? 독일인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혜안에 새삼 놀라면서 말이다. 칼 야스퍼스는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서 우리나라 장인이 조각한 미륵반가사유상을 보고 찬사를 보낸바 있다.

“나는 고대 그리스 신들의 조상(彫像)도 보았고,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뛰어난 조각상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직 완전히 초월되지 않은 지상적, 인간적인 잔재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미륵반가사유상에는 실로 완전하게 완성된 인간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돼 있었다.(중략) 나는 수십 년 동안 철학자로 살아왔지만 이만큼 인간의 실존을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진실하게 구현한 예술품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

칼 야스퍼스의 진실한 고백이 내 마음을 대변해 준 듯하다. 나는 회랑의 조각품들을 큰 감동 없이 감상하면서 라파엘로의 방으로 갔던 것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폴로,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등등 아테네의 명사 54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글·사진=정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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