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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대 그노래 -다시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2> 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결혼식 헌정곡
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야학 동지 박기순 영혼 결혼식
소설가 황석영 등 문화운동가들 노래극 ‘넋풀이’ 7곡 제작
광주의 아픔 넘어 어두운 세상 밝히며 산자들의 임무 일깨워
2018년 06월 04일(월) 00:00
올해 5·18국립묘지에서 진행된 추모식 장면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 묘역. 신랑 윤상원 열사와 신부 박기순 열사의 결혼식이 열렸다. 한겨울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묘역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깊은 적요를 깨고 휑한 바람이 불어왔다.

생전의 윤상원은 노동자이자 들불야학 교사로 활동하던 청년이었다. ‘노동자’와 ‘야학교사’는 그의 삶의 지향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명징한 단어였다. 시대의 불의에 결코 눈을 감지 않겠다는 다짐이 이미 그의 삶에 내재돼 있었던 것이다. 윤상원은 5·18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계엄군의 만행에 맞서 광주를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책무이자 운명이었을 것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5시 계엄군이 도청을 향해 진입해 들어왔다. 윤상원은 결코 도망을 가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신군부의 만행과 폭압에 결코 눈감지 않고 죽음으로써 시대의 증언자가 되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계엄군의 총에 맞아 장렬히 산화한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한 살이었다. 야학교사를 하며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꿨던,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청년은 그렇게 계엄군의 총탄에 스러져갔다.

박기순 열사. 1976년 전남대 역사교육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1978년 3학년 때 시국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당한다. 역사의식이 남달랐던 여학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노동운동을 전개한다. 같은 해 7월 광천동에 들불야학을 창립해 노동자 야학 운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해 12월 불의의 사고로 사망을 하기에 이른다.

윤상원 열사 생가 모습. <윤상원기념사업회 제공>


윤상원은 1978년 12월27일 자신의 일기장에 ‘영원한 노동자의 벗 기순이가 죽던 날’이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전남대 선후배 사이였고, 들불야학의 동지였던 이들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노래가 만들어진 이후 영혼결혼식에 바쳐졌다고 보는 게 맞다. 다음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진 배경에 관한 일화다.

그해(1982) 4월 광주 운암동에 살던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 지역 문화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김종률, 전용호, 오정묵, 윤만식, 김선출 등을 비롯한 10여 명이 5·18민중항쟁 2주기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지난 2월에 치러진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에 바치고 살아남은 자들의 의지를 결연히 다지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노래극 ‘넋풀이’가 탄생됐다. 이 ‘넋풀이’에 수록된 7곡 중 대미를 장식한 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황석영이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를 개작해 가사를 붙였고,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그리고 전용호는 노래굿의 공연팀을 구성했다.

“‘넋풀이’를 제작하기 위해 모인 사람 중에 아무도 참여의 계기를 묻지 않았다. 서로의 친분관계로 모인 문화일꾼들은 오히려 이 일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 김종률도 참여하라는 제안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다. 적어도 광주 사람이라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광주에서 민중항쟁의 모든 것을 직접 보고 겪은 학살의 현장에 있었다면 불참을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무엇인가 나도 할 수 있다는, 산자들이 남아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신심만이 불타올랐던 것이다.”(박종화, 『서예와 함께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 심미안, 2018)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박성천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